나무 한 그루를 읽는 동안 / 최지안

 

 

 

여름이 문을 닫고 간다. 변심한 애인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그렇더라도 여름이 남긴 발자국은 아직 푸르다. 보리수도 한창이다. 봄에 빨간 열매가 골목을 환하게 밝혀주던 나무다. 키가 크지 않아도 열매를 달았다는 자부심도 있었으리라. 인심도 좋아 동네 아이들이 오며가며 따 먹어도 부러 가지를 내어주고 본척만척하였으리라.

많은 열매를 품고도 나무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고작 열 개가 채 못 된다. 아마 나무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몸에 달렸어도 자신이 가져갈 수 있는 양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아이의 손이 놓치거나 바람에 실족한 것들이 보리수의 몫이었다. 제 발밑에 오종종하게 떨어진 것을 내려다보며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나마도 몇 개는 개미나 벌레에게도 나눠주었을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그새 품이 커졌다.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여리고 마른 가지가 두세 개 있던 것을 사다 심은 것이 2년 전인데 제법 모양새를 갖추었다. 여름내 팔을 뻗어 식구 수를 늘렸나 보다. 피보나치수열로 가지를 늘린 나무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외양을 가꾸었을 것이다.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참 신기한 일이다. 자연의 황금비율은 어쩜 그리 편안하고 보기 좋을까 말이다. 솔방울도 해바라기 문양도.

그런데 골목 쪽으로 뻗은 가지가 수상하다. 담장의 검정색 철재 장식 사이로 가지가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어느 틈에 그리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자고 가지는 그 틈새로 팔을 뻗은 것인지. 더 자라면 담장을 부수던지 가지를 잘라내든지 해야 하는데. 알고는 있을까. 담장을 부수기보다 가지 하나를 잘라내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늘 골목으로 고개가 기우는 나무였다. 아이처럼 밖으로 귀가 솔깃하다. 아마 사람들이 모르는 이야기가 골목에 있나 보다. 야트막한 산 초입 단풍나무숲은 박새들의 본거지라 어떤 새들도 놀러 가지 못한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말이다. 뒷집에 사는 턱시도 고양이와 거처를 모르는 얼룩 고양이의 기싸움이 궁금했던 것일 수도 있다.

낮이면 검은 고양이 일가가 앞집 마당에서 일광욕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아침에 그 집 사람들이 모두 나가면 한낮의 고요한 틈으로 고양이들이 들어와 제 집인 양 마음 놓고 마당 잔디에서 뒹굴거나 그늘진 주차장에서 낮잠을 자는 사실을 말이다. 그 집 식구는 까맣게 모르고 있으리라. 보리수는 고양이들의 재롱을 보며 그 사실을 눈감아 주었을 것이다.

오전 10시 반쯤 이면 만사 제쳐 놓고 골목을 쳐다봤으리라. 서너 살 되는 어린이집 아이들이 줄로 연결된 고리를 잡고 올망졸망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는 것을. 간신히 걸을 줄 아는 아이들이 풀을 뽑거나 길 가는 강아지를 보며 참견하면 선생님이 다시 줄을 맞춰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 쪽으로 돌아나가는 풍경을. 그 대열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고 있었으리라. 고개가 그쪽으로 까딱까딱 휘어지는 줄도 모르고.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들을지도 모른다. 가로등 옆 쥐똥나무가 하얀 꽃을 피운 어느 밤 누군가 전화를 하며 울먹였던 일들을. 한국으로 일하러 온 사람이었을까. 먼 곳의 식구에게 보고 싶다고 끝내 울먹이던 키가 작은 여자. 쥐똥나무 꽃향기에 취한 가로등이 그 사연을 몰래 듣다 가슴이 무너져 등이 나간 얘기를 전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이 팔 하나가 저도 모르게 철재 구멍으로 쏘옥 들어가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한눈을 팔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바뀔수록 사는 일은 나무가 가지를 늘려가듯 더 복잡해지고 바빠졌다. 아이들이 크면 여유로운 시간이 더 생길 줄 알았다. 그러나 여유가 생긴 틈보다 새로 벌인 일들이 더 많았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지고 참견하고 싶은 일들도 많아졌다. 가야 할 곳도, 읽어야 할 책도, 써야 할 원고도 많았다. 나도 보리수처럼 가지를 늘리고 잎사귀를 부지런히 달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보니 이것저것 일만 벌려놓고 소화하지 못하는 상태까지 온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 처음 생각했던 대로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들여놓은 발을 빼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빼기 힘든 상태일 때가 많다. 그러나 그대로 두기엔 뒷감당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계속 납입하자니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고 해지하자니 그동안 납입한 것이 아까운 보험처럼 말이다.

동아리 모임은 친분과 의무감으로 이루어진 동그란 덩어리 같다. 처음엔 시간도 되고 공부하면 좋을 것 같아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시작한 동아리지만 해가 지날수록 시간적인 부담감이 더해갔다. 작은 모임 하나를 정리하는 것은 큰 모임을 정리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만두고 싶어도 그동안 맺어온 정 때문에 더더욱 쉽지 않다. 블록 하나 빼면 와르르 무너지는 젠가 놀이처럼 나 하나 빠지면 그들과의 친분도 무너질 것 같아 말도 못 한다.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몸이 둘이어도 모자랄 지경인 것이다.

주인 닮은 보리수를 쳐다본다. 들어가지 말았어야 하는 구멍에 이미 들어간 가지는 저 혼자 굵어 질대로 굵어져 있었다. 아무리 쳐다봐도 수가 나지 않는다.

그대로 놔둘까. 아니면 찬바람 불어 잎사귀 떨어질 때 가지를 쳐 낼까. 아냐. 담장이 부서지든 나무가 부러지든 그냥 팔짱끼고 두고 보자. 하지만 전지가위로 막을 일을 톱으로 막는 불상사는 만들지 말아야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내 손으로 가지를 쳐내야 하나. 물론 자르면 당장 저나 나나 속이 쓰리겠지.

정말 어찌할지 모르겠다. 보리수도, 방만했던 내 일상도.

나무 한 그루를 읽는 동안 계절이 바뀌고 있다.

<시와 산문 2019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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