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한복용

 

 

 

 

 

 

 

 

  11월이 되면 새 수첩을 산다. 1년 동안 동고동락할 수첩이다. 각양각색의 다이어리들과 함께 진열 돼 있는 문구점에서 내가 찾는 수첩은 늘 정해져 있다. 몇 년째 같은 수첩이다. 가로 10, 세로 23센티. 그동안 다양한 수첩을 써왔지만 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이다. 이번 색상은 짙은 하늘색이다. 단순한 디자인, 넓은 메모 공간, 달력은 기본이다.

 

 한가한 시간을 기다려 새 수첩에 중요한 정보를 옮겨 적는다. 글씨는 천천히, 되도록 정갈하게 쓴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하는 것이니 조심스럽다. 책을 부칠 때나 편지 보낼 때 필요한 주소와 전화번호 등은 뒤쪽에 따로 적어둔다. 새로운 달로 넘어갈 때면 단번에 찾게끔 그 달에 스티커를 붙인다. 그리고 새해에 첫 달력이 낯가림하지 않도록 올해 12월 일정을 그대로 옮겨 적어놓는다. 정리하고 나니 새해가 머지않았다.

 

 아직 한 달여 남아있는 올해 수첩을 만진다. 손때가 묻은 수첩은 본래 두께보다 두꺼워졌다. 곳곳에 포스트잇이 덧붙었기 때문이다. 기억력이 좋지 못한 나는 하루의 절반을 기록에 의존한다. 기록된 대로 움직이고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어떤 땐 뭐라도 쓰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시간이 불안해서 적는다. 강의를 들을 때 손은 연신 무언가를 받아쓴다. 통화 중에도 습관처럼 수첩을 꺼내든다.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이 나오면 수첩에 옮겨 놓는다. 내 수첩은 밥벌이용이기도 하고 잊히기 쉬운 내 의식과 무의식이 모여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왼손으로 수첩 등허리를 잡고 오른손 엄지에 힘을 주어 차르르, 종이를 쓸어 넘긴다. 일 년의 기록들이 불규칙적으로 넘어간다. 어떤 장은 빼곡하게 그날의 감정들을 연필로 옮겨놓았다. 꽃 주문을 받아 여러 번 확인한 쪽도 있다. 때로는 공간장식에 필요한 설계도를 그렸고 어떤 때는 제작용 물품들이 나열 돼 있기도 하다. 쓰다가 만 문장이 꺾인 가지처럼 널브러져있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겹쳐 그려놓은 여러 개의 동그라미가 그날의 불안을 대신하기도 했다. 빈 종이 사이에 끼여 있는 얼룩이 특이한 나뭇잎은 쓸쓸한 날 일산호수공원을 산책하다 만난 단풍잎이다. 다음 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이름들이 주욱 나열되었다. 그 이름들 밑으로 ‘나는 이들로 인해 살아왔고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것이다’라는 문장이 굵은 글씨로 씌어있다. 나의 선생님과 친구들, 대가없이 응원하는 가족, 내 글이 좋다고 가끔 편지를 보내오는 분, 담쟁이 넝쿨처럼 잡은 손 놓지 않고 끝까지 갈 문우들이 떠오른 날이었나 보다. 그 이름들 아래 몇 번이고 밑줄이 그어져 있다. 그날의 내 기분이 어땠었는지 궁금해진다. 하나같이 소중한 이름들이 그 한 면에 적혀있을 줄이야. 아무래도 그날 나는 어떤 큰 결심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 쓴 수첩 겉장을 손바닥으로 쓰다듬는다. 일 년 동안 고생한 나의 손을 보는 것만 같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헛되게 살지는 않았다. 남들처럼 표시 나게 이룬 것은 없어도 하루하루 긴장을 놓지 않고 살아왔다. 거래처와의 약속을 지켰고 간간이 친구들과도 만났다. 원고 마감일을 넘기지 않으려 몇 번이나 마감일에 연필자국을 찍기도 했다. 새로 배운 용어들을 옮기면서 잃어버리지 않으려 그 뜻과 사용처를 나열하고 뒤늦은 공부를 위해 읽어야 할 책을 메모해 두기도 했다. 부모님의 기일과 사랑하는 가족의 생일, 새로 태어난 조카손주를 처음 만나러 간 날 등, 빼곡하게 적힌 칸칸마다 내 숨소리가 담겨 있다. 긴 한숨소리만 채워진 날도 있다. 수첩을 보면서 이번 1년도 기적처럼 살았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2020년 새해 수첩을 연다. 맨 앞에 미리 적어 놓은 2019년 12월 달력이 군데군데 일정이 표시된 채로 보너스로 붙어 있다. 묵은 것이 뚝 떨어져나가고 새것이 생뚱맞게 자리하는 것이 아닌, 어제와 오늘이 연결 돼 있는 수첩. 있던 것이 사라져 슬퍼할 일도 아니고 새로운 것이 왔다고 수선 떨 일도 아니다. 날짜는 그저 표시이니 그 표시 따라 살아가면 된다. 꿋꿋하게 내 할 일 하면서 뒤도 돌아보고 앞도 살펴보고 두리번거리기도 하면서 가야 하지 않을까. 수첩은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매스컴에서는 새해에 더 살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한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나는 내가 걸어왔던 대로 살 것이다. 소소한 계획을 세우고, 시끄러워도 그러려니 하고, 조금 불편해도 견뎌나가 볼 참이다. 아등바등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 향해 대거리를 해봤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다. 이제는 헛힘 빼지 않고 묵묵히 걸어갈 일이다. 바람이 밀어주는 대로, 언덕을 만나면 만나는 대로, 묵묵히 뛰었던 어느 가을날의 힘겹던 마라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