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가계부家計簿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아내는 가계부를 쓰지 않는다그 일로 결혼하면서부터 한 십 년은 상당히 여러 번 다투었지만 아내는 끝끝내 가계부를 쓰지 않았다결국 내가 먼저 아내의 가계부 쓰게 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가계부 쓰기는 돈의 수입과 지출을 기록한다는 것보다는 그걸 통해 우리 가정의 역사가 남겨지길 바랐던 것이었는데 아내에게 가계부란 그저 금전출납부란 생각만 먼저 들었었나 보다.

가계부란 기본적으로 수입이 지출보다는 많아야 그래도 들고 나는 것을 기록할 수나 있을 텐데 당시엔 그것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 그건 외상 장부 아니겠느냐는 항의였을 것이다그런데 요즘 갑자기 다시 가계부 생각을 하게 된다경조비에 대한 기록만은 갖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하도 결혼식이 많고()을 당하는 일도 많아 자칫 잘못하면 내가 인사를 했는지 아니 했는 지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인사를 못 했을 경우 나중에 만나면 거기에 맞는 인사를 해야 하는데 그 내용들을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다갔을 때는 당연히 했겠지만 못 갔을 경우 축의금이나 부의금만을 보냈는 지 조차 헛갈린다특히 서로 때가 비슷하면 더욱 그랬다해서 실수를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참 사랑의 빚을 많이 졌다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이요 그것은 곧 내가 갚아가야 할 사랑의 빚들이기도 하다그래서 사랑의 가계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다그래야 잊어버리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빚을 갚아갈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다그런데 사랑의 가계부는 일반 가계부와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일반 가계부는 수입을 중심으로 하여 지출을 기록해 가는 것이지만 사랑의 가계부는 그런 법칙으로는 쓸 수 없는 가계부일 것이다무엇보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많아야 될 것이고얼마든지 많이 주면 줄수록 좋을 것이다.

사람은 동물 중에서 가장 욕심이 많을 것이다그것도 필요 이상으로 욕심을 내곤 한다안 해도 될 일도 하겠다고 하고안 가져도 될 것도 갖고자 하고그러면서 정작 해야 할 일은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안 하려 하는 묘한 성격의 동물이 바로 인간이 아닐까그것은 부부 관계에서도 빈번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사실 욕심만큼 무서운 것도 없을 것이다욕심은 지극히 자기 이기적인 것으로 일단 갖고자 욕심을 내다보면 이성을 잃게 되고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게 된다.

화성 남자 금성 여자로 유명한 상담가 죤 그레이는 부부의 심리적인 유대관계 경고신호를 원망-거부-억압-파탄의 단계로 얘기하고 있었다부부간에도 자기 위주의 지나친 기대와 욕심은 정상적이던 관계마저 깨트린다는 것이다처음엔 원망의 감정이 되다가 그게 심해지면 상대를 거부하는 마음이 되고나중엔 억압적 마음 상태가 되어 결국 파탄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럴 때 사랑의 가계부를 쓴다면 아주 달라지지 않을까. ‘오늘은 아내에게 00을 해 주었다.‘ 그런데 아내는 내게 xx를 해 주었다.‘ 지극히 작은 것사소한 것으로부터 내가 하루 동안에 알게 모르게 받았던 그리고 내가 주었던 것을 기록해 본다면 오늘은 아내한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받았구나.‘ ’그런데 내가 해 준 것은 없네?‘ 하며 다음 날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될 것이다.

사랑 가계부에선 수입과 지출의 균형이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오히려 얼마나 많이 줄 수 있었는가가 더 중요하리라그것이 내게로 돌아올 것이건 그렇지 않건 그건 문제가 아니다다만 그날그날 받은 것과 준 것을 비교해 보며 받은 것에 대한 뜨거운 감사와 줄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감사가 모두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최고의 가계부일 것이다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것이 역시 인간이 아닐까받는 것이 더 기쁘고 내 소유로만 채우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내 분수라는 항아리를 마치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는 요술 주머니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사랑의 마음도 동정의 마음도 내 욕심에 가려져 버리는 요즘 삶 속에서 문득문득 섬뜩해지곤 한다이기적인 생각들로 꽉 채워진 내 분수의 항아리엔 양심이나 이해심이 들어갈 자리도 없다그러나 한 가지 희망은 있다이제라도 사랑 가계부를 쓰는 일이다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써나가다 보면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내 것을 아무것도 주지 않는데 그런 나를 누가 좋아하겠는가그런데도 지나고 보면 늘 나는 준 것이 없는데도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받고 살아온 게 내 삶이었다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주는 데는 인색하다그런 내가 가계부를 쓰는 것은 그나마 남은 내 삶의 순간순간에 보다 더 사랑을 느끼며 살고 싶음이다.

내가 먼저 가계부를 쓰면서 아내에게도 금전출납부가 아닌 사랑가계부를 써보자고 해야겠다그럼 아내도 분명 그러자고 할 것이다사랑 가계부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도 철이 들어가는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