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론 / 황성진 - 2004년 동양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내가 ‘분재 가꾸기’에 눈을 뜬 것은 이 학교에 근무하면서 부터이다.

학교생활에 적응해 갈 무렵 동료 선생님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집은 그리 크지 않은 평범한 한옥이었는데,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간 나는 깜짝 놀랐다.

마당 가득 놓여 있는 분재들, 3월인데도 꽃을 피운 진달래, 매화 등의 화분들, 정녕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때부터 나의 취미는 ‘분재 가꾸기’로 굳어졌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늘 그 선생님 댁에 찾아가서 분재 가꾸기의 모든 것을 사사 받기에 노력했다. 분갈이, 가지치기, 철사감기, 단엽처리, 거름주기 등 배울 수 있는 전부를 배우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야산을 돌아다니며 쓸만한 분재감을 고르기도 하였고, 그것을 캐어 화분에 이식하는 등의 맹훈련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이론과 실기를 병행한 교육을 받다보니 분재 가꾸기의 참 의미를 조금씩 조금씩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나도 100여 점의 분재를 소장하게 되었다. 오랜 실패를 거울삼아 키워 온 내 사랑의 분신들이다.

소품 분재에서부터 어른둘이 들 정도의 큰 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양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소사나무, 느릅나무, 느티나무 등의 작은 잎과 단풍이 아름다운 나무들, 동백나무, 소나무, 측백나무 등 늘푸른 이파리가 보기 좋은 나무들, 그리고 석류나무, 모과나무, 배나무 등 유실수 계통이 마당 가득 놓이게 되었다. 내가 소중하게 소장하고 있는 백여 개의 분재 중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하나가 있다.

바로 소사나무 분재로 수령이 약 2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비루먹는 나무이다. 우연히 고향 마을 지나다 발견하여 분에 옮겨 심은 지 근 10년 가까이 된 나무이다. 애초에 소 말뚝용으로 야산에 박아 놓은 것이 싹이 나게 되었고, 그러다 착근이 되어 자라다 나의 눈에 발견된 것이다.

정말 볼품없는 모습의 나무로, 겨우 철사걸이를 통해 꼴을 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분재이다.

내가 이 비루먹은 소사나무 분재에 마음을 쏟게 된 이유는 3년 전의 그 일이 있고서부터이다.

그 해 2월은 정말 따뜻했다. 2월인데도 기온은 영하로 내려가질 않았으며 눈 대신 비가 내리곤 하였다.

봄방학이 되어 여유가 생긴 나는 화분의 분갈이를 했다. 웃자란 가지를 적당히 쳐주었고, 산발한 뿌리를 알맞게 솎아내어 새 분에 새 마사토를 한껏 덮어 주었다. 한달쯤 지나자 분재는 여느 해보다도 더 탐스런 꽃과 이파리를 피워 주었다. 보기에 좋아 흐뭇했다.

그런데 그 문제의 소말뚝용 소사나무 분재만이 싹을 틔우지 못하는 게 아닌가. 보름쯤 더 관심을 갖고 물을 주고 애지중지 보살폈으나 싹은 나오지 않았다. 별달리 애착도 없던 분재인지라 화분에서 나무를 뽑아 뒤란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는 이내 잊어 버렸다.

6월 초 여느 해보다 일찍 장마가 찾아왔다. 수일간 계속된 비로 인해 지반이 약한 흙이 무너졌고, 그 여파로 뒤란에 토사가 쌓여 물이 흥건히 고이게 되었다.

장마가 소끔해진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고인 물을 빼고 뒤뜰 정리를 하기 위해 뒤란을 찾았다. 물빠짐이 수월하도록 도랑을 쳐주고 흘러내린 흙무더기들을 정리하자 이내 본래의 뒤란으로 돌아왔다.

끈끈한 기온에 힘을 썼던지라 땀방울이 많이 흘렀다. 수건을 찾아 이마의 땀을 닦던 나는 토사에 묻혀있던 여린 이파리 더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잎을 흔들어 빼보니 몇 개월 전 버렸던 소사나무였다. 싹이 트지 않아 내동이친 소말뚝용 소사나무였다. 순간 나는 너무 놀래서 그 여린 이파리를 따 깨물어 보기도 하고, 뿌리를 붙잡고 흔들기도 해 보았다.

분명 던져질 때 죽었던 나무가 습기가 있는 뒤란에서 자생(自生)한 것이었다.

나는 그 놈을 가져다 물로 닦고 또 닦기를 거듭한 끝에 화분에 다시 심었다 그리고는 다른 분재보다 더 많은 정을 기울여 키우고 아꼈다.

지난 6월 하순에 나는 몸살이 심해 결근을 했다.

온 몸이 지근 지근 쑤시고 뼈마디가 아파 거동조차 하지 못했다. 몸뚱이는 물먹은 솜처럼 천근만근 무거워졌으며 엉덩이가 방구들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기에 어쩔 수 없이 병가를 낸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동료들이 문병을 왔다. 더러는 한아름 꽃다발로 웃음을 주기도 하고 더러는 한바탕 웃음꽃으로 위안을 주기도 했다.

그 중 한명이 “거봐, 황 선생. 나무를 못살게 하니 몸살이 나지. 저 놈들은 어떻겠나. 철사로 두 손 두 발 다 묶이고, 저처럼 작은 화분에 구속되어 지내니, 하루도 몸살 안 나는 날이 있을까.”

문병객이 떠나고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작은 기후 변화에도 적응치 못하고 몸져눕는 내 육신인데, 팔 다리가 잘린 채 화분에 담겨 지내는 저 나무들은 오죽할까.

다음날 나는 내 소유의 분재들을 집 앞의 정원에 모두 심었다.

그 비좁은 화분의 울타리를 벗은 나무들은 생기 있게 자랐으며 윤기 잘잘 흐르는 나뭇잎도 보기 좋았다. 내내 신열이 들뜬 모습으로 몸살을 앓던 나무들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중 특히 눈에 띄는 소말뚝용 소사나무를 보면서 우리 학생들이 연상됨을 어인 일인가.

사람들은 흔히 ‘집 떠나면 고생’이라 말한다.

기존의 환경 속에서 생활해 오다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이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새 환경에 적응하려다 보니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이 닥치게 되고 그로 인해 좌절하고 슬퍼하며 지내다 겨우겨우 새롭게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할 수 있다.

학교라는 작은 화분에 담겨 정규 수업 알비료를 먹고 특기 적성교육의 가지치기를 당하는 학생들, 그뿐인가 부모의 열성 교육열로 학원 수강이라는 철사걸이까지 당하는 우리네 집안 말뚝용 분제들, 그들은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몸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땅의 모든 나무들을 화분에서 풀어줄 때가 된 것 같다.

가식이 없는 자연의 일부로 자라서 저 울울창창한 낙락장송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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