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 이정림 -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1

골목안-1, 까만 점이 얼굴에 군데군데 찍혀있는 낡은 그림을 앞에 놓고 관상쟁이 영감이 앉아 있다. 흘러 내릴 듯이 콧등에 걸쳐 있는 돋보기 안경 너머로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 끈끈한 시선의 그물에 걸려 들지 않으려고 나는 얼굴을 외면한 채 그 앞을 서둘러 지나간다.

「샥시, 그 점 빼야혀. 그렇지 않으면 눈물복이 많겠수…」

하고 언젠가처럼 또 나를 불러세울까 공연히 신경이 서기 때문이다.

입술에 점이 있으면 먹을 복이 많고 눈밑에 점이 있으면 눈물복이 많다고들 한다.

거울을 들여다볼 적마다 왼쪽 눈 밑에 있는 팥알만한 점을 빼야겠다고 늘 생각은 하지만, 막상 실행하기가 무엇이 그리 힘든지 그대로 그 흉점(凶點)을 달고 다닌다.

이 점 탓일까.

나는 어려서 유난히도 많이 울었다. 어렸을 때 별명은 「울새」였다. 한 번 울었다 하면 지겨운 딸국질처럼 도무지 그치려 들지를 않았다고 한다.

언니는 우는 나를 업고 곧잘 돼지우리로 달려갔었다. 그치지 않으면 돼지우리에 던져버리겠다고 위협도 해보였으나 내 울음은 그 정도에서 그쳐주지를 않았다. 그럴 때마다 언니는 내 연한 엉덩이를 멍이 들도록 꼬집어대곤 하였다.

어쩌다 길에 넘어져서 울음보가 터지면 온 식구가 진땀을 뺐다. 아무리 일으키려고 애를 써도 땅 위에 엎딘채로 울어대었다고 한다.

결국 멀리 채마밭에 가신 어머니를 불러오고 무슨 일이 났나하고 허겁지겁 달려오신 어머니가 일으켜 세워야 그제서 울음을 멈추었다니 내 울음끝이 얼마나 질겼으리라는 것은 가히 짐작할만 하다.

그러나 눈물이 많다는 것은 흔히 말하듯이 상서롭지 못한 징후일까? 세 살 적에 나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내 울음과 아버지의 돌아가심이 만의 하나라도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면 나는 평생을 뼈를 깎는 죄책감으로 괴로워 해야될 것이다.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실 임박(臨迫)에 보였던 불길한 징조가 몇가지 있었다고 한다.

개가 높은 데에 올라 앉아 있으면 나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얼룩무늬 사냥개가 처량하게도 낟가리 위에 올라 앉아 며칠을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않고 지새웠다. 장대를 휘둘러 내려 쫓으려해도 내려올 생각은 않고 그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 불길했던 모습을 가슴에서 영 지워내지 못하는 어머니는 지금도 개를 싫어하신다.

그리고 내 울음-.

커가면서 나는 많은 인사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울던 아이가 벌써 이렇게 컸니?」

이 말이 그토록 내게 부끄러움을 주었던지 나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 뜯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겹게 울던 막내를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사랑하시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얼굴도 채 익히지 못한 어린 것을 퍽 불쌍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리라.

그런 어머니에게서 난생 처음으로 몹시 매를 맞은 일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어느날 나는 한 반 친구인 머슴애를 데리고 집엘 돌아왔다. 포도과수원을 하던 때라서 그 애에게 포도를 따주고싶은 마음에서였다.

포도가 익기에는 철이 일러서 포도알은 아직 파란 채로 딱딱하기만 했다. 어떤 송아리는 미처 크지도 못해 꼭 어린애 젖꼭지처럼 조그마한 것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도 있었다.

집에도 들르지 않고 그 아이를 데리고 과수원으로 곧장 들어갔다. 그리고는 채 익지도 않은 포도 송아리를 따서 겁에 질려 서있는 친구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 신나는 선심을 얼마나 베풀었을까.

갑자기 여지껏 들어보지 못한 어머니의 노기띤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를 향하여 채 돌아서기도 전에 나는 포도밭 고랑에 엎으러졌다. 평소에 그렇게도 마음이 좋으신 어머니였지만 그때만은 정말 무서웠었다.

맞고 또 맞았다. 일어설 수도 없어 포도나무 밑둥만 쓸어안고 엎디어 있었다. 매가 뜸해지자 나는 겨우 눈을 들어 포도잎새들 사이로 하늘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멀리 개울둑을 향해 쏟살같이 달아나는 머슴애의 모습을 뿌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발 아래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포도송아리를 가만히 주워 들고 안쓰럽게 들여다보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다시금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구치었다.

서울로 학교를 옮기고 그 부끄러운 추억이 깃든 과수원에는 방학 때만 내려갔다. 식구들 가운데 이 조그만 사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포도밭이랑을 거닐며 그때의 일에 새삼 홍조(紅潮)를 띠울만큼 나는 철이 들어 갔다.

 

2.

내 소녀시절은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여자의 그림을 수없이 그리고 지우는 속에서 지나갔다. 아름답게 성장(盛裝)한 여인을 그려놓고도 마치나 점정(點睛)을 하듯 한방울의 눈물을 그려넣지 않고는 허전해 하였다. 많은 여인들이 내 손끝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라져갔다.

골목어귀에서 너댓살 나보이는 사내아이가 울고 서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발등만 내려다보며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다. 그런 모습이 쫄쫄 우는 계집애보다 더욱 슬퍼보이게 한다.

하지만 갑자기 그 아이가 퍽 어른스러워 보이는 건 웬일일까.

소리내어 우는 것이 창피스럽게 생각되어지기 시작한 아이는 이미 어린애가 아니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눈물을 자제할 줄 아는 법을 배운다. 체면과 지위와 나이가 감정의 솔직성을 가로막는다.

「치기(稚氣)스럽게…」

「어린애 같이…」

「어른이 돼 가지고…」

이런 어휘의 껍질 속에서 인간의 감정은 바삭바삭 말라간다.

그래서 종내에는 남의 아픔에도 무감각해지고 만다.

때로 눈물이 없는 사회를 생각하면 전율(戰慄)을 느낄 때가 있다. 무미건조하고, 삭막하고, 몰인정하고… 그 속에서 인간은 컴퓨터를 조작하는 로봇이 되어가지 않을까.

눈물 – 거기에는 불가사의한 마력(魔力)이 있다. 눈물 짓는 여인 앞에서 칼자루를 풀어놓지 않는 장군이 있으랴.

태양이 행인(行人)의 외투를 벗기듯이 여인의 눈물은 장군을 무장해제(武裝解除)시킨다. 그래서 많은 역사의 이면에는 여인의 입김이 서려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피눈물 앞에서 자신을 회개치 않는 탕아(蕩兒)가 있으랴. 그래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이 생기면 범인(犯人)의 어머니를 그 앞에 내세우는 것이다.

오랜 방탕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초라한 남편, 그 남편이 뿌리는 회한의 눈물 앞에서 평생을 그늘지게 산 아내는 증오보다 용서를 택한다.

이 눈물의 힘을 무엇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약간의 식염과 단백질이 포함되어 있는 이 누액(淚液)이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눈물은 정녕 신비로운 것이다.

이 신비(神秘)를 어느 과학자가 규명할 수 있단 말인가.

신비는 영원히 신비일 뿐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운 민족이었다. 노래에도 시(詩)에도 눈물이 흘러 넘친다.

내가 슬프기에 남의 슬픔을 알아주는 착한 성정(性情)을 지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서양에서는 새가 지저귀는 것을 노래하는 것으로 들었지만 우리네는 새조차 슬피우는 것으로 알았다.

촉 나라 망제의 죽은 넋이 씌웠다는 두견새- 그 울음이 우리에게는 피를 토하는 통곡으로만 들리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할 때 먼저 눈에 이슬이 맺힌다.

웨딩마치에 발을 맞추는 화사한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남몰래 눈시울을 적신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맺히는 이슬은 행복의 결정(結晶)이다.

무척이나 눈물을 사랑하는 민족이다.

그러나 프랑스 말에서도 이승을 「눈물의 골짜기(발르 드 라므)」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우리가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곧 눈물의 연속인 모양이다.

그 언젠가 나는 잡초 속에 버려진 한 무덤 앞에서 마멸(磨滅)되어 가는 비문(碑文)을 읽은 일이 있다.

「벗님네 들이여, 내 무덤 앞에 눈물을 보이지 말아주오 나 후회없이 이 세상 살다 간 것을…」

비석 뒷면에는 두 사람의 누이의 이름만이 댕그라니 적혀 있었다. 아마도 아까운 나이에 요절(夭折)한 어느 무명 젊은이의 무덤이었으리라.

장수(長壽)를 누리고 자손이 번성한 노인의 죽음은 호상(好喪)이라 하여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영원히 가시는 길이거난 그것이 슬픔의 길이기 보다는 오히려 또 하나의 영락(榮樂)의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후회없이 살다 간 인생에는 눈물이 필요치 않다. 그래서 일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어떤 유명 여류 인사의 고별식에는 영광(榮光)의 노래가 흐르지 않았던가. (「어떤(水分)」 改題)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