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고 싶은 날/ 장미숙

 

언제부터였을까. 매일 보는 사물이 어느 날 달라 보일 때가 있다. 그걸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책을 읽는 것에 다독, 정독, 속독이 있듯이 본다는 것에도 다시, 정시, 속시가 있는 것 같다. 빠르게 보고 지나쳐버리는 것도 있고, 많이 보지만 별로 잡히지 않는 게 있는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는 장면이나 풍경도 있다.

시선이 꽂히면 주위 사물들은 흐릿해진다. 오직 보고자 하는 장면이 뚜렷하게 다가온다. 그런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작정한 게 아닌 만큼, 마음이 흔들리거나 존재의 의미에 한껏 고양되기도 하나 보다.

오늘 식탁에서 밥을 먹다가 무심코 거실 벽 쪽에 놓아둔 화초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순간, 화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모양이 이상했다. 화초의 중심이 기울어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줄기가 사선으로 휘어진 모양이었다. 휘어짐은 벽 쪽을 향했다. 가까이서 보니 확연히 기운 본줄기를 따라 잔가지도 벽 쪽으로 몸을 향하고 있었다.

화초는 가지가 많은 데다 가느다란 야자수 종류다. 생뚱맞게도 화초의 외로운 마음이 읽혔다. 그렇게 생각하자 줄기에 새겨진 시간의 마디가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무엇에라도 기대고 싶었구나.’ 이파리를 어루만졌다. 대답이라도 하는 듯 손끝에 전해지는 푸른 기운이 삽상했다. 초록빛이 ‘반짝’ 하고 빛난 것 같기도 했다.

화초도 사람 모양 외로웠던 것일까. 기대고 싶은 게 필요했고 마침 벽이 옆에 있으니 벽 쪽을 향해 손을 뻗은 것인가. 닿을 듯 말 듯 기울어진 그들의 어깨 사이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어쩌면 화초를 통해 나는 나를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이 버거운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몸이 바로 서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날들이 많아졌다. 새벽녘,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밥을 먹을 때, 허허로운 들판에 서 있는 듯 적막했다. 먹어야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무감으로 아침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을 때의 동물적 본능이 서러웠다.

건너다보이는 옆 동 아파트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새벽 다섯 시, 불이 켜진 창은 세 곳이나 네 곳이 전부였다. 불빛을 보며 누군가도 나처럼 홀로 식탁에 앉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면 비몽사몽인 상태로 알람과 실랑이를 벌이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은, 불 켜진 우리 집 창을 바라보는 이가 있을 법도 했다.

추우나 더우나 예외 없이 집을 나서야 하는 순간들은 끝없이 이어져 왔다. 살기 위해 일을 한다는 건 숭고할지라도 한 번쯤은 팽팽한 삶의 줄을 땅,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직장일 뿐만 아니라 주변 때문에 숨 돌릴 틈이 없었다. 가족이 있고, 혈육으로 이어진 관계들이 있고, 사회적인 인연들이 있고 어딜 가나 편안히 쉬고 싶은 공간은 없었다.

권리보다 의무가 많고, 한 가지도 놓을 수 없는 날들이었다. 어깨가 뻐근하고 다리가 팍팍해도 끌고 가야 할 생이 버거웠다. 게다가 몸마저 아우성을 쳤다. 혹사한 몸이 주인을 향한 반항의 신호로 자꾸만 제동을 걸었다.

감기쯤 병으로 생각지도 않고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감기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시드러운 몸이 되었다. 약을 먹고 며칠씩 앓아야 하는 걸 보면 세월이 간다는 게 그냥 나이만 먹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만큼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는 걸 몸이 간곡히 알려주고 있었다.

기대고 싶었다. 가벼운 연기처럼 소멸을 꿈꾸었다. 기대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벽이 있다면 무념무상으로 그곳에 등을 부리고 싶었다. 그래서였나 보다. 화초가 벽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 내 존재의 미약함처럼 보였다.

어쩌면 벽 또한 화초의 몸을 받아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존재란 원래 고독 속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 않은가. 생명이 있건 없건 존재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외로움 덩어리다. 벽인들 왜 텅 빈 가슴을 채우고 싶지 않았겠는가. 화초를 끌어당겨 품었음 직하다. 서로 의지해야 살아갈 수 있는 이치를 터득했으리라.

그런 생각으로 벽과 화초를 바라보자 야생의 자연 한 귀퉁이를 떼어다가 옮겨놓은 양 아름답다. 티 없이 맑은 하얀색 벽에 돋을새김으로 도드라진 화초의 초록빛이 갓맑다. 이질적인 두 가지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하얀색 벽은 온전히 화초를 위해 있는 듯하다. 만약 벽이 다른 색이었다면 화초의 초록과 어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세상에 정해진 몫은 없는 것 같다. 때로는 화초가 되기도 하고 벽이 되기도 하는 게 삶이 아닐까 싶다. 내가 기대고 싶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듯, 또 누군가는 내게 기대고 싶어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누구에게 벽이 되어준 적이 있었던가. 기대려고만 했던 건 아니었을까. 당연한 물음을 품어본다.

기댄다는 건 나보다 상대가 품이 넓어야 가능한 일이다. 상대방 인격의 깊이도 모르고 무작정 기대었다간 둘 다 나동그라지기에 십상이다. 틈을 전혀 주지 않는 상대에게서는 오히려 튕겨 나갈 수도 있다. 기댄다는 건 친밀함의 두께를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수많은 감정 중,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 중심의 뿌리는 얼마만큼 깊은지, 아니면 흙 속에 파묻히지도 못한 채 겨우 땅만 붙잡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알 길이 없다. 누군가 내게 기대온다면 휘청거리지 않을 만큼의 깊이라면 좋겠다. 서로 붙잡아줄 수 있는 정도에서 모자람도 지나침도 없는 딱, 화초와 벽 같은 것이 아닐까. 그 정도라면 나도 누군가에게 무른 등이나마 내어주고 싶다.

<수필과비평 202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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