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다는 것 / 현정원

 

 

 

 

음식의 맛이란 게 기껏 혀끝에서 목구멍에 도달하는 6cm 사이의 기쁨이란다. 그뿐인가. 혀에서 목까지의 두 치의 낙을 위해 마음을 쏟고 정신을 기울이는 것은 화장실에 충성하는 것이란다. 이 무슨 기가 찰 일인지…. 30여 년 반찬 하느라 애써온 걸 생각하면 억울하기까지 하다. 끼니를 챙긴다는 게 어디 쉬워야 말이지. 미리도 못하고 미루지도 못하고 몰아서도 못하는, 게다가 날이면 날마다 꼬박 3번씩 닥치는, 일이지 않던가.

아니지! 차분해지자. 다산을 인용해 상추쌈을 예로 들며, 박한 음식을 진미로 속이라는 것은 식탐을 줄이라는 말일 게다. 제목부터 <물가유감(勿加惟減)>이지 않은가. 음식이나 맛 같은 것에 괜한 힘 빼지 말라는 권유는 오히려, 안 그래도 그런 일에 시들해져가는 나로서는, 신명나는 일이다. 생각해보라. 이보다 좋은 구실과 명분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이건 뭐지? 신문의 다른 면에서 ‘아프냐? 총알오징어도 아프다.’라는 재미있는 문구를 발견한다.

대형유통업체들이 총알오징어 판매금지를 선언했단다. 그동안 새끼오징어에 ‘총알’이라는 이름을 붙여 일반 오징어와는 다른 종류인 듯 팔아왔는데, 의도치 않게 오징어멸종에 가담하게 된 것을 안 소비자들이 비난 여론을 일으킨 때문이란다. 한편에서는 문어 ‧ 오징어 등 두족류와 바닷가재 ‧ 새우 등 갑각류와 같이 고등신경계를 갖고 있는 동물을 먹는 것, 혹은 산 채로 요리하는 것에 관한 논쟁도 일고 있단다. 운반을 위해 얼음에 넣어질 때조차 동물들이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서다.

먹는다는 게 이렇게나 끔찍하고 징그러운 일이었다! 혀로 느끼는 그 짧디짧은 희락을 위해 인기 어종을 싹쓸이하는가 하면 살아 있는 동물을 칼로 자르고 소금에 절이고 불로 지지고 기름에 튀기고 또…. 탐식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먹지 않고 살 방법을 찾아야 할 판이다. 하지만 나도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린 인간이란 우주에 홀로 고립되어도, 빙하기를 견디는 기차 안에서도,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도, 사랑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꾸역꾸역 씹어 삼키는 존재인 것을….

슬그머니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실은 아까부터 친구와 주고받은 말들이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이 아침, 내가 신문칼럼에 오버하는 것은 친구가 얼마 전 겪었다는 그 일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 참, 속상해서…. 어제저녁에 조기를 6마리 구웠거든. 크기가 제법 큰 걸로. 니 생각엔 우리 집 식구 한 사람당 몇 마리씩 먹어야 할 것 같니?”

친구의 식구가 셋임을 떠올리며 내가 대답했다.

“두 마리.”

“그지? 어젠 사정이 있어 아버님이 먼저 식사를 하셨거든. 다 드신 것 같아 설거지하러 내려갔더니 글쎄 남은 조기가 세 마리밖에 없는 거야. 갑자기 화가 나는 거 있지. 원체 식탐이 있으신 걸 알면서도 말이야. 마침, 아버님이 방에서 나오시더라고. 내가 여쭸어. 조기가 작지 않았는데 세 마리나 드셨냐고. 아버님이 그러시는 거야, 물컵을 식탁에 탁 소리 나게 올려놓으시면서. 먹다 보니 맛있어서 그랬는데 그럼 안 되냐고.”

할 말이 없었다. 친구의 시아버지는 고도비만이신 데다 신부전을 앓아 당신을 위해서라도 식사량을 줄이셔야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조기는 염장 생선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어지는 친구의 말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다.

“첨엔 아버님이 너무 얄밉더라고. 무슨 일에든 당신만 생각하시니까. 그런데 설거지가 끝나갈 즘 되니까 참담해지는 거 있지. 결국 내가 화가 난 건, 내 몫의 조기 한 마리가 줄어들어서잖아. 순간, 내 자신이 어찌나 치사하게 느껴지던지…. 먹는다는 게, 어찌나 구차스럽고 혐오스럽던지….”

친구는 이제부터 생선을 먹지 않을 생각이란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생선을…. 만정이 떨어졌다는 게 이유다. 아휴 정말, 먹는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 전화가 울린다. 큰녀석이다.

“응? 이번 주 토요일, 여기 제주 집에 오겠다고? 왜, 갑자기? 뭐?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어머! 정말이야? 너, 지금 행복하구나! 엄마? 엄마도 당근 좋지. 근데 뭐가 이렇게 급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알았어, 알았어. 저녁식사 함께할 수 있게 준비해 놓을게.”

가족들이 둘러앉은 식탁의 모습이 눈앞에 두둥실 떠오른다. 비혼주의자였던 큰녀석 옆에 예쁜이가 앉아 있다! 입이 절로 벌어진다. 코로나 덕분이지만 내 손으로 요리하게 된 것조차 싱숭생숭 흥분을 일으킨다. 전화를 끊자마자 대충 옷을 걸치고 서둘러 집을 나간다. 손님을 맞으려면 마당에 꽃도 좀 심고 오이소박이라도 담가놓아야 할 것 같다. 차를 향해 걸으며 이리저리 식단을 고민한다. 6cm를 가장 멋지게 아니, 맛있게 속일 수 있는 방법을.

그러고 보니…? 그 조그맣고 빨갰던 녀석이 180이 넘는 건장한 허우대가 된 건 잘 먹어서일 것이다. 또 혀끝에서 목구멍 사이의 6cm에서만 맛을 느끼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코도 맛을 보고 눈도 맛을 흡수하지 않던가. 그것도 어떤 때는 혀나 입보다도 풍성히. 그뿐이랴, 두 치의 만족이라고는 하지만 그 시간이 결코 짧지 않다. 나만 해도 어디 하루 세 끼만 먹던가. 아니아니 그 무엇보다, 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때의 충만감을 어찌 버리랴.

큰일 날 뻔했다. 조금 전 칼럼을 읽으며 속으로 바랐던 알약으로 음식을 대체하는 세상, 취소다. 건강 같은 뻔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당장 이번 손님맞이만 해도 맛있는 것이 끼지 않으면 그 얼마나 시시하고 멋쩍을까. 환대하고픈 내 마음은 또 어떻게 표현하고. 역시 화장실을 위한 게 아니었다. 음식 만드는 노력과 맛내기에 쏟는 정성. 그것이 가족이나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일 때는 더더욱….

차에 시동을 건다. 부디 내가 시장에서 만날 고기가, 생선이, 또 오이 등등이 고통 없이 그 자리에 왔기를 바라면서다. 또 우리의 유쾌한 식탁에 식탐 같은 나쁜 것이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면서다.

<에세이문학 202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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