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아이 / 김영인
 

 

도서관 열람실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몸은 의자에 둔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듯하다. 나는 정적만 가득한 공간을 둘러보다 살며시 일어나 문을 열고 나온다. 여닫이문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이 다른 세계 같다.

휴게실에 들어선다. 한 소녀가 창밖을 향해 앉아 있다. 얇은 셔츠 위로 등뼈가 앙상하다. 가까이 가보니 승희다. 그렇게 있은 지 오래된 듯 빈 베지밀 병 두 개가 앞에 놓였다. 거친 입김이 병 표면에 서리다 사라진다. 자신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 것인지 눈동자는 흐리고 두 볼은 빨갛다. 어김없이 무슨 말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승희의 저 독백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이혼한 부모님, 미장원 일로 바쁜 엄마, 자주 폭력을 쓰는 오빠, 따돌리는 친구, 보고 싶은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인가. 승희의 과거를 들을 때마다 내 가슴 한켠으로 아린 통증이 재생된다.

내가 네댓 살 무렵이었던가. 아버지는 한 손에 농기구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엄마를 끌고 동네 한복판으로 나갔다. 미친 듯 흥분해 난동을 부리는 아버지를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나와 동생은 울면서 엄마, 엄마만 외쳤다. 몸을 늘어뜨린 채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은 나의 뇌리에 돋을새김으로 명료히 남았다.

아버지는 인정이 많았다. 풍류까지 있어 흥이 나면 늘 민요를 낭창하게 불렀다. 하지만 가랑잎에 불붙는 듯한 성미가 문제를 일으켰다. 마찰이 생기면 대화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엄마의 잔소리를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두르고 살림살이를 집어던졌다. 그러고 나면 집안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나와 동생은 자꾸 구석진 곳을 숨어들었다.

몇 년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가장이 무너지면서 그 무게는 고스란히 엄마가 떠맡았다. 언니 오빠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찍이 타지로 떠났다. 엄마는 들일이며 품앗이로 늘 바빴다. 삶이 고달픈 엄마와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소리보다 몸짓만을 배웠다. 그래서인지 나는 대화가 서툴렀다.

밭일 나간 엄마는 어두워서야 돌아왔다. 놀러 나간 동생도 해가 저물어야 들어왔다. 하교해서 집에 오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어질러진 집부터 청소했다. 방이며 마루를 쓸고 닦았다. 마당을 쓴 다음 우물터를 오가며 물을 길었다. 집안일을 어느 정도 해놓은 뒤 바깥으로 나갔다. 동네 아이들은 삼삼오오 어울려 놀고 있지만 나는 집 뒤 낮게 엎드린 산에 올랐다. 볕 바른 무덤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책을 펼쳤다. 소설 속에는 나보다 더 애달픈 주인공이 많다. 온갖 역경을 헤쳐나가고 설움을 받으면서도 자기만의 삶을 살아간다. 멋진 남자와 절절한 사랑도 나눈다. 내 안의 아이는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울고 웃는다. 혼자일 때 외로움을 잊는 방법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단짝이 생겼다. 우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 공통점 때문인지 금방 친해졌다. 성향은 조금 달랐지만 좋아하는 선생님은 같았다. 둘이 빠듯한 용돈을 모아 꽃을 사서 교무실 선생님 책상에 몰래 꽂아두기도 했다. 토요일 하굣길엔 헤어지기 아쉬워 팔짱을 낀 채 버스정류장까지의 길을 몇 번이나 오갔다. 속속들이 다 터놓고 오래도록 의지했던 친구가 서서히 멀어지는 기미가 보였다. 너스레를 놓는 재바른 친구들이 더 재밌고 마음에 맞았던 모양이었다.

혼자가 된 나는 정류장까지 터벅터벅 걸었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소설책을 꺼냈다. 환승을 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차에서 내려 집까지 가는 시골길에서도 책에만 눈을 두었다. 어느 때는 버스에 그대로 앉아 종점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뜬금없이 마음이 요란해지면 자리를 박차고 나와 발길 닿는 대로 쏘다녔다.

마음에 상처가 된 장면들은 꿈에서 재현되었다. 그런 꿈이 잦아질수록 내 안의 열등감과 피해의식도 커졌다. 나의 어두운 과거나 불리한 부분은 내면 깊숙이 감췄다. 사람을 만났을 때, 마음이 다칠 듯하면 바로 발길을 되돌렸다. 피해의식에 갇힌 나는 늘 변방으로 배회했다. 사람들로부터 외진 변방은 외로운 곳이었다.

나에겐 질문이 많아졌다.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 어떻게 해야 자존감을 지니고 당당하게 살아갈까. 어떻게 해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게 물을 때마다 내 안의 아이는 속수무책 울었다. 어르고 다독거려줄 사람이 없었다. 내가 의사가 되어 스스로 처방전을 내렸다.

책을 잡았다. 책을 펼치면 우울하고 외로운 마음이 사라진다. 하지만 다가오는 감정을 억지로 피해버린 회피처가 된 것도 같다.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을 잊지만 그것은 잠시 아픔을 다스리는 진통제일 뿐이다. 손에서 책을 놓고 시간이 지나면 내 안의 아이는 몸을 움츠린 채 다시 칭얼거린다.

명상을 배워 수련에 들었다. 고요의 시간에서 내 안을 들여다보았다. 욕심 많은 나, 화내는 나, 비겁한 나, 울고 있는 나, 외로운 나, 소심한 나… 여러 나를 만났고 그 상처를 보듬으려 애썼다. 요란했던 마음이 잔잔해졌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마주할 용기도 났다.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람마다 무의식에 봉인시켜 놓은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다. 우리가 힘들게 살아가는 건 그것들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와 자신을 조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신을 달래기 위해 무엇에 취하고 어딘가로 떠나고 도피처를 찾기도 한다. 삶이란 어쩌면 내 안의 아이가 울먹이는 소리에 부응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성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인정받고 싶은 아이, 사랑받고 싶은 아이가 나와 칭얼대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마음의 상처도 살갗의 상처처럼 약을 바르거나 몇 바늘로 꿰매어 나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싶어진다.

아직도 간혹 내 안의 아이가 몸부림친다. 나 아직 힘들어, 나 아직 고통스러워, 이대로 포기하고 싶어, 그러면 나는 차 시동을 걸고 아무 곳으로나 떠났다가 돌아온다. 내 안의 나를 만나러 말이다. 하지만 바람을 쐬었다고 해서 마음을 다지고 돌아왔다고 해서 금방 다 좋아지는 건 아니다. 머리가 희끗희끗 물들고 지난 삶을 긍정적으로 회고할 수 있을 때 내 안의 아이도 더는 칭얼거리지 않을 것이다.

승희가 좁은 어깨를 움츠리며 의자 아래로 주저앉는다. 이제는 타인보다 울부짖는 자신에게 치여 사는 승희, 초점 없는 눈빛 속에 그 애의 아슬아슬한 갈망이 스치다 사라진다. 승희를 보면 사랑과 인정의 결핍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무력하고 피폐하게 만들어버리는지 보게 된다.

승희에게 다가간다. 움츠린 아이 등에 내 손을 살짝 얹는다. 많이 외롭고 힘들지? 이젠 어두운 그곳에서 한 발짝만 걸어 나와 봐봐, 한 발자국만….

<계간수필 2021년 여름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