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것은 굴러야 한다 / 최장순

 

 

바람 빠진 바퀴만큼이나 바람 빠진 오후다. 생기 돌던 시간은 어느새 네 시를 향해 절뚝거린다. 마구 달려가고 싶은데 소진된 기운은 좀체 굴러가려 하지 않는다. 봄날의 나른함이다. 바람 가르던 눈부심이 저만큼 사라졌다. 먼지 앉은 자전거들이 적막하다.

 

값나가는 자전거들은 아파트 현관 안에 모셔두지만 아파트 출입구 보관대에서 묵묵히 주인을 기다리다 지친 자전거들. 내달리지 못할 때 자전거는 자전거가 아니다. 길은 영영 사라진 듯 보인다. 보다 못한 관리실이 처분하겠다는 안내장을 걸어도 요지부동이더니 어느 날 일제히 자취를 감췄다. 스스로 굴러간 것이 아니라 폐기처분된 것이다.

 

자전거 페달에 겨우 발끝이 닿은 내가 균형을 잡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모든 ‘첫’은 긴장과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어서 비틀대다 넘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반복된 연습에 초보 딱지는 절로 떨어져 나갔다. 운동장 한 바퀴를 용케 돌고 나면 큰일이나 해낸 것처럼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의 출퇴근용 자전거는 나와 누나들에겐 신비한 은륜의 세계였다. 그 세계에 한 발짝 닿기 위해 나는 부지런히 키를 키웠고 자란 키만큼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야 했다. 아버지의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아버지의 휴식은 내게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동그란 것을 보면 굴리고 장난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자전거를 보면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싶어지듯. 굴리고 싶은 욕구는 어릴 때 구슬치기에서 시작되었다. 서랍 가득 따 놓은 구슬은 재미에 곁들인 배짱으로 키운 놀이의 산물이었다. 철사로 만든 굴렁쇠, 자전거 타이어 테, 자동차 타이어와 튜브도 굴리는 데는 제격이었다. 모두 타고난 본성대로 굴러가려는 욕망이었다.

 

고개 드는 만용은 미숙함을 감추기 위한 것. 구멍 숭숭 뚫린 비상활주로용 철판으로 만든 좁은 다리를 자전거로 건너야만 으쓱 어깨를 세울 것만 같았다. 운동장 몇 바퀴를 너끈히 돌았다는 자신감은 용감하게 다리를 건널 것만 같았다. 지켜보는 누나들에게 보란 듯이 자랑해야지. 마치 면허시험이라도 치듯 다리를 통과하려던 참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멈칫거림과 동시에 균형을 잃고 냇물로 곤두박질쳤다. 박수는커녕 비명만 불러온 첫 통과의례는 비참한 결과로 드러났다. 그때 알았다. 둥근 것을 멈추는 순간, 눈치가 빨라 내쳐 고꾸라뜨린다는 것을. 둥글어서 바퀴, 각진 것은 둥근 힘을 빌려와야만 한다. 네모에 바퀴를 달아주면 자동차, 세모에 바퀴를 달면 자전거다.

 

자신의 발품으로 가장 정직하게 굴리는 것이 자전거다. 2인용 자전거에 몸을 싣고 합력으로 달리는 커플의 모습은 아름답다. 불화하지 않고 한 호흡으로 마음을 모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울퉁불퉁한 길에서 체인이 벗겨지기라도 하면 서로에게 짐이 된다. 멀리 갔거나 오르막일수록 후회는 배가된다. 그러니 자신의 들숨과 날숨에 알맞게 속도를 조절할 일이다. 지친 아버지를 태우고 퇴근길을 재촉하던 그 길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언덕길에서 고단한 땀을 식히던 바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 끙끙 고향을 끌고 가던 비포장 길이 신작로로 변한 지금, 속도에 길들어진 자동차만 살벌한 바람을 가르고 있다.

 

30대 젊은 목사가 개척한 작은 교회는 이름이 ‘수박교회’다.

“왜 수박입니까?”

물으면,

“네모는 못 굴러가니까 ‘오라’고 하잖아요.”

그의 명쾌한 대답에 갸우뚱, 그가 덧붙여 말한다. 수박은 물이 많고 달다. 둥글다. 보호색이 있다. 그것은 꿀처럼 단 생명의 말씀, 안주하지 않고 미지의 땅으로 가고, 소외되고 약한 자를 보호 하겠다는 것. 부르기 쉽고 친근하고 겉과 속이 달라 궁금증마저 불러일으키는 수박의 매력으로 필요한 곳으로 굴러가겠다는 것이다. ‘네가 와라’ 하는 부동이 아니라 ‘내가 갈게’하는 둥긂의 철학이다. 그의 수박론은 수박만큼이나 시원하고 명쾌하다.

 

둥근 바퀴 없이 사람과 물건들은 움직이기 어렵다. 밀거나 끄는 것보다 굴리는 것이 힘이 덜 든다는 것을 영민한 인간이 모를 리 없다. 수많은 물류의 이동은 모두 바퀴의 힘에서 비롯된다. 지금 앉아있는 의자도 바퀴가 있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 바퀴라 한 말도 과언이 아니다.

 

저절로 둥글어지지 않는다. 각을 버린 둥긂. 마모되는 것들은 제 살을 깎는 아픔이 있다. 비와 바람과 파도의 오랜 시간을 거친다. 우레의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마모되고 견디며 둥글게 다듬어진다. 그러나 스스로 깎이기는 어렵다. ‘자전’ ‘자동’이라고 해서 스스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듯. 누군가, 무엇인가의 힘이 있어야 한다. 자전거가 회전축을 움직이는 페달을 밟아주어야 가능한 일이듯.

 

굴러야 하는 것이 멈추면 불안하다. 일상의 곳곳에 바퀴처럼 둥근 힘들이 존재한다. 버스 자동차 수레…, 매일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컨베이어 벨트까지. 둥근 바퀴의 힘은 작동한다. 어쩌면 일상은 둥근 트랙 속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이들이 제대로 굴러갈 때 안녕하다. 점점이 얽힌 체인과 삼각형의 뼈대, 그리고 바퀴의 협업으로 달리는 자전거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 멈출 수 없는 질주,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희열이다. 마냥 바람을 질주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뒷걸음을 모르고 앞을 향해 달리는 자전거는 멈추지 않는 한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

 

구른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진보하는 것이다. 진보에는 고통이 따른다. 처음부터 둥근 돌이 아니었다. 강 상류에서 시작된 모난 돌들은 강의 하류에 도달할 때쯤 둥글게 변한다. 온몸이 밀리면서 오랜 부딪침과 씻김의 시간 속에 새롭게 태어남이다. 성급함은 진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어할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 살을 내어주는 아픔 없이 그저 정綎으로 두들기듯 쪼아대면 저항만 커질 수밖에 없으니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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