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 마르의 초상 / 노혜숙

 

 

피카소가 그린 <도라 마르의 초상>을 보고 있다. 평면 위에 사방팔방의 다시점이 그대로 펼쳐진 그림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모습을 동시에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구성이다. 분석하고 쪼개고 통합하되 대상의 지배적 특징이 잘 드러나도록 형상화했다. 400년 동안이나 지속된 단일시점을 다시점으로 바꾸는 일은 혁명이었다. 피카소의 5호 여자라 불리던 도라 마르, 정신병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사진작가다. 그녀의 눈물과 탄식이 그림을 타고 흘러내릴 것만 같다.

작년 이맘때였다. 우연히 창덕궁에 갔다가 만개한 홍매화를 만났다. 여신처럼 사진작가들에게 둘러싸여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었다. 조선시대 왕궁의 고아한 풍취 속에 분홍과 다홍 어디쯤의 꽃빛은 혼곤했다. 다분히 감성을 뒤흔드는 색에 이끌려 찍고 또 찍었건만 마음에 드는 사진은 없었다.

올봄 다시 그곳을 찾았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주말이었다. 창덕궁 홍매화 앞에 섰을 때쯤 비는 그치고 낮은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물기를 머금고 한결 선명해진 꽃잎에선 생기가 넘쳐흘렀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홍매화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좀 다르게 찍어 보자 싶었다. 오후였고 빛은 강했으나 기능적으로 색 조절을 할 만큼 능숙하진 않았다. 카메라 무게로 어깨가 처질 때쯤 모니터엔 273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삼백여 장에 까가운 사진을 찍어댄 것이다.

허망했다. 결과가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정된 구도이긴 했으나 특별할 것 없는 사진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사진, 누구라도 찍을 수 있는 무난한 사진이었다. 정지된 화면 속에서 홍매는 생기를 잃고 무표정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여린 꽃잎을 흔들며 몽환적 빛을 발산하던 그 생동감은 어디로 갔는가. 온몸으로 살아있던 홍매의 매혹이 거기엔 없었다. 기술적 한계을 감안하더라도 자기만의 시선이 없는 사진은 복사품처럼 식상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던 한 장의 사진을 떠올렸다. 제주 오름을 찍은 김영갑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엔 오름의 생생한 실존과 그 실존을 온몸으로 껴안고 담아낸 혼의 울림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 오름의 표정을 읽기 위해 서성였을까. 사진 속엔 섬세하게 오래 들여다 본 자만이 포착할 수 있는 풍경의 깊이와 여운이 있었다. 마침내 풍경에 스며들어 그 오름의 바람과 안개와 흔들리는 풀이 되게 하는 물아일체의 경험, 나는 오랫동안 그가 담아낸 바람의 환청을 들어야 했다.

본질을 통찰하는 시선과 자기만의 시선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도라 마르의 초상>에서는 전체적으로 그녀를 그녀이게 만드는 지배적 분위기와 색이 있다. 피카소라는 대지에 안착하지 못한 채 불안하게 흔들리다 시들어버린 붉은 장미. 피카소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한가운데서도 그녀의 가시와 향기를 동시에 그려낼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매인 바 없는 다시점 시선과 냉철한 거리가 아니었을까.

사람살이가 중심이 되는 문학에서는 다시점의 시선이 더욱 절실해진다. 모든 개인은 복잡할 수밖에 없는 구조와 조건을 지니고 있다. 말 한마디, 가벼운 몸짓 하나에도 수많은 맥락이 얽혀 있는 것이다. 단일시점으로는 그 복잡하고 다양한 맥락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표면을 겉도는 문자로 무슨 깊이를 담아낼 수 있겠는가. 만약 피카소가 도라 마르의 아름다운 얼굴에만 초점을 맞춰 그렸다면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김영갑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긴 여운과 감동 역시 대상에 대한 지극한 열정과 헌신의 대가일 것이다.

모순은 있다. 인간의 본질을 그토록 여러 모습으로 통찰하고 그려낸 피카소도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에게 모진 상처를 주었다. 그의 연인들 가운데 몇 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림은 곧 그의 내면 그림자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재능과 통찰이 창조를 위한 파괴적 도구로 발휘되었다 하더라도 도덕성을 문제 삼아 그의 천재성을 폄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의 본질을 꿰뚫어 보여주면서 그 본질을 잔인하게 외면했던 피카소. 본질을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가. 그 괴리를 직시하며 인간 세상의 토양을 말랑하게 풀어가는 것, 그것은 어쩌면 모든 예슬가의 영원한 화두일지 모른다.

나는 어슷비슷한 사진을 한나절이나 찍고 와서 탄식했다. 여전히 현상에 머물러 있는 외눈박이 시선과 십 년 넘게 들고 다닌 카메라 속성에 대한 무지를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기초 없는 토대 위에 누각을 세우려는 욕심 아니었던가. <도라 마르의 초상>에서 한 말씀 듣는다. '네가 본 것이 곧 너의 세계'라는 것을.

<인간과 문학, 202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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