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로초, 그 꽃빛 / 정재순

 

전율이 느껴진다. 이토록 멋들어지게 비유할 수가 있다니. 작가는 글자 나라를 구석구석 헤엄쳐 다녔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모조리 퍼 담아 쫀쫀한 망에 걸러내고 걸러내어 오묘한 것들만 데려왔을까. 어쩌면 팝콘이 터지듯 한 방에 팡, 하고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한 순간의 느낌으로 내달리 듯 그렇게.

'풍로초' 라는 글을 만났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깊은 시선이 느껴졌다.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혹시 낯선 세상을 자유로이 날아다닐 아스라한 날개가 있는 걸까. 진분홍 꽃잎을 피우는 풍로초, 구구절절 그 꽃을 가까이서 보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 마치 풍로초의 자그마한 꽃잎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 했다.

작가의 상상력은 곳곳에서 반짝였지만 '건듯 불어오는 바람을 핑계 삼아 다른 잎을 슬쩍슬쩍 밀기도 하고 잎에 있는 줄기의 발등을 톡톡 건드리며 어느새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풍로초가 꼬물꼬물 귀염을 떨며 노니는 게 그의 눈에도 훤히 보였던 것이다. 아침을 기다리는 예비 꽃들의 심호흡 소리가 들린다며, 피울 게 있는 풍로초가 신나 보인다고도 했다. 무언가 피워 내려면 반드시 건실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사월 중순 무렵부터 몽우리였다가 꽃으로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풍로초, 고것들의 나직한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다. 자기를 빤히 보던 꼬맹이의 눈망울이 저 하늘보다 더 말갛더라는, 어제 그 꿀벌은 옷맵시가 엄청 세련됐더라는 그들의 소소한 이야기는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풍로를 돌리는 듯 하염없이 피어나는 꽃잎들의 수다에 묻혀 나의 한나절이 금세 지나갔다.

온 몸에 소름을 돋으며 한 번 더 읽었다. 불현듯 이상스런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구심에 다시금 찬찬히 처음부터 읽어 내려갔다. 역시나 없었다. 풍로초의 꽃, 그 곱디고운 진분홍 빛깔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멋들어진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온통 신경을 쏟는 것일까.

나는 그 분과 달리 화려한 꽃 빛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쪼그리고 앉아 고것들의 눈 코 입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풍로초를 소재로 내가 글을 짓는다면 한 번쯤은 짚어보았을 것이다. 나와 같은 여자임에도 그 빛에 끌리지 않았나 보다. 사람들의 겉모습과 내면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랬다.

우리 집 마당 수돗가는 봄이 되면 생명들이 고개를 틀어 올린다. 그들이 겨울잠에서 기지개를 켜면 그제야 나도 여기저기 물을 흩뿌려주며 옴짝거린다. 새들새들하던 잎들이 하루가 다르게 초록빛을 더한다. 풍로초의 집은 크고 길쭉한 배 모양이고 갈색 질그릇이다. 여느 날처럼 물을 주려다 분홍빛 머금은 자그마한 몽우리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다. 매섭고 건조한 계절을 밀어내고 있어 마음이 다 환해진다.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이사 온 후 불편하기가 부지기수지만 버젓이 내세울 만한 좋은 점도 있다. 삼층 건물과 담벼락 사이 우리 집 마당 모퉁이에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즐비하다. 서너 평 정도의 직사각형 공간은 야생화들의 천국 같다.

한창 햇살이 뜨거울 즈음이면 건물이 가리개 역할을 톡톡히 한다. 바람과 햇볕이 그리고 그늘의 들락거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야생화라 이름 지어진 것들이 제 끼를 한껏 뽐낼 수 있도록 힘을 돋구어준다.

햇살을 담뿍 받은 풍로초는 웃자라지도 않거니와 땅의 기운을 빨아들여 풍로초의 꽃 빛이 눈부시다. 첫사랑에 달뜬 처녀 가슴속보다 더 붉다. 족두리를 쓴 색시의 연지곤지와 고운 입술을 연상하게 만든다. 어느 물감으로, 어떤 새침한 붓으로 흉내 낼 수 있을까.

풍로초는 봄볕이 한 번만 꽃 심지에 입김을 후, 불어주면 끊임없이 진분홍빛 불꽃을 화르르 피워 올린다. 집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그 빛깔에 이끌려 말을 걸어오고 골목 안 이웃들도 자연스레 모여든다. 겨우내 움츠렸던 마음이 오가는 발걸음에 한 겹 한 겹 풀어진다. 머지않아 피어날 풍로초, 그 꽃잎들의 남은 수다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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