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건 / 목성균

 석산이가 저 세상으로 갔다.

그는 희귀하고 어려운 불치의 병을 2년 남짓 앓다가 갔다세포가 재생되지 않는 병이라고 했다.

병명이 궁금했으나 알 필요는 없다분명한 것은 이제 영영 그를 볼 수 없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세포가 재생되지 않는 만큼 기력과 사고력을 같이 잃어버리면서 비교적 고통 없이 죽었다고 한다조만간 죽을 거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죽었으니까 암 같이 아픈 병에 비하면 거의 안락사에 가까운 죽음이었지 않나 싶다.

아직 애들도 짝지어 놓지 못하고 환갑나이에 가다니 옛날에는 대견스럽게 여기던 나이지만 지금은 평균수명에도 못 미치는 아까운 나이다석산이는 인생의 책임을 통감하며 갔을까사바의 고통을 어릴 적 여름 냇가에서 잠뱅이 벗어 던지듯 홀랑 벗어 던지고 갔을까.

어제 석산이는 연풍 한들모퉁이 저의 종산 발치 한자리를 차지하고 육신을 묻었다나는 발인만 보고 장지에는 안 갔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오더니 오늘은 개였다해가 지면서 서편 하늘의 구름이 숯불처럼 탄다지금 석산이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천사들의 손에 이끌려서 극락을 향해서 훨훨 날아가고 있을까험상 굿은 저승사자의 우악스러운 포승에 묶여서 지옥으로 떠밀려 가고 있을까살아서 그는 나쁜 짓을 한 게 없다내가 알기에 석산이는 영업용 택시 운전기사를 직업으로 가지고 고생스럽게 살았다고생을 기독교에 의지해서 이겨내며 선량하게 살았다석산이는 분명히 천사의 손에 이끌려서 저 숯불처럼 타는 구름 너머천산(天山저쪽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천국을 향해서 서역만리쯤 가고 있으리라.

석산이는 내 고향 동갑내기 초등학교 동기다그는 죽으면서 한가지라도 우리들이 만든 생의 순간을 생각해 보았을까임종을 당해서 가족들과의 미결 사항을 아쉬워하기에도 바빴을 터인데 우리들의 추억을 돌이켜 볼 여지가 있었을 리 만무하다나는 석산이가 나까지 기억하면서 죽어 주었기를 기대할 만치 염치없는 놈은 아니다내가 석산이의 어려운 삶에 보탬이 된 게 뭐가 있기에앙심을 먹고 손아귀에 조약돌을 움켜쥔 주먹으로 그의 코피를 터뜨려 준 것밖에 없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우리 집은 수원에서 연풍 윗버들미 골짜기로 이사를 했다그 때 거기 애들은 무명 적삼에 잠방이를 입고 책보를 허리에 동여매고 은고개 너머 연풍 초등학교 십리 길을 걸어 다녔다석산이는 아랫마을에 살았다퉁방울 눈을 하고 덩치가 나보다 컸다연풍 초등하교에 전학을 하고 첫 등교를 하는 날 석산이는 양복을 입고 란도셀을 멘 도시학생 풍의 내 모습이 못마땅했던지 내 뒤에 따라오면서 똥가방똥가방-.’ 하고 란도셀을 걷어찼다.

며칠 동안 나는 무리에 낄 수 없는 한 마리의 원숭이처럼 외로웠다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애들 뒤에 처져서 혼자였으나 석산이와 악동들은 은고개 마루에서 기다렸다가 란도셀을 걷어차며 똥가방똥가방’ 했다.

하루는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석산이가 뒤따라오며 내 란도셀을 또 걷어차며 똥가방이라고 했다이제는 운명의 한판 승부가 불가피 하게 되었다우리는 은고개 어귀 이강들 냇가에서 맞붙었다석산이의 완력을 당하기에 역부족이었으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나는 조약돌을 하나 손아귀에 움켜쥐었다그리고 품고 있던 앙심을 다해서 기습적으로 그의 코중배기를 쥐어질렀다. ‘어쿠’ 하면서 석산이는 코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그리고 코를 문지르고 일어서는 그의 얼굴은 터진 쌍 코피로 피범벅이 되었다석산이는 주먹으로 코피를 훔치고 내 코피-.’ 하더니 벌 쏘인 황소처럼 내게 덤벼들었다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났다우리는 쫓고 쫓기며 은고개 마루까지 왔다숨이 차서 더 이상 달아 날 수가 없었다석산이도 숨을 헐떡거렸다우리는 서로 노려보면서 서낭나무 아래 서 있었다석산이가 먼저 땅바닥에 털버덕 주저앉았다나도 따라서 털버덕 주저앉았다그리고 나는 백기처럼 손수건을 꺼내서 석산이를 주었다석산이는 새하얀 손수건에 코피를 묻히기가 미안했는지 받아 들고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코피 닦아-.”

싫어

석산이는 손수건을 쓰지 않고 내게 도로 주었다그리고 풀숲에서 마른 쑥 잎을 뜯어 가지고 비벼서 솜처럼 만들더니 그걸로 코피가 나는 코를 틀어막았다.

코피가 나면 이렇게 하는 거여-.”

새 학기가 시작된 이른 봄이었다애들은 고개 아래 저만큼 오고 있었다아지랑이가 가물가물 애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받아 가지고 피 묻은 녀석의 넓데데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그 말 한 마디는 했을 것이다오래되어서 누가 그 말을 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그 후 나도 무명 적삼에 잠방이를 입고 란도셀’ 대신 무명 책보를 허리에 동여매고 학교를 다녔다그렇게 우린 우정의 물꼬를 트고세월이 흘러서 나는 결혼을 하고 석산이도 우리 동네 내 여동생 친구와 혼담이 오고가더니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들이 약혼식을 한날읍내로 약혼사진을 찍으러 간다며 석산이가 우리 집에 손수건을 빌리러 들렸다그 털털한 촌놈이 손수건의 필요성을 느껴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신록이 우거져서 뻐꾸기가 유장하게 우는 초여름이기도 했지만 생전 처음 처녀와의 외출에 진땀이 났던 모양이다아내가 장롱 깊숙이 간직해 두었던 손수건을 한 장 꺼내 주었다손수건 한 귀퉁이에 봉숭아 꽃잎을 조그맣게 수놓은 당목 손수건이었다물론 나도 쓰지 않은 새 것이었다혼인 전아내가 눈 오는 깊은 밤 누군지 모르는 자기 사람을 위해서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수를 놓고 삶아 바랬을 눈처럼 하얀 손수건이었다.

제수씨 고맙습니다.”

임마먼저 장가든 동생도 있다 든-. 형수라고 해-.”

그 때 문득 하얀 손수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돌려주던 얼굴에 코피 칠갑을 한 녀석의 넓데데한 초등학교 적 얼굴이 생각났다.

손수건을 빌려주고 나는 묵은 빛을 값은 것처럼 기뻤다.

동구 밖을 걸어 나가는 둘의 모습신랑감은 앞서가고 색싯감은 몇 발자국쯤 떨어져서 뒤따라갔다동네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그 광경을 기쁜 얼굴로 바라보았다나도 그랬다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발인 때석산이 아내가 영구차에 관이 실리는 걸보고 통곡을 했다얼굴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그래도 눈물을 닦지도 않고 울었다문득 손수건이 생각났다손수건을 건네주고 싶었다물론 손수건이 없어서 석산이 댁이 눈물을 안 닦는 것은 아니겠지만 석산이를 생각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생각만 그랬지 이목이 있어서 못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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