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떠나야 할 나그네/맹난자

 

 

 

       도연명의 만가(挽歌) - 其三

 

        荒草何茫茫   황폐한 풀은 거칠게 우거졌고,
        白楊亦蕭蕭   백양나무도 쓸쓸하게 서 있다.
        嚴霜九月中   서리 덮인 구월에 사람들은
        送我出遠郊   나의 상여를 멀리 교외까지 전송해 나왔다.
        四面無人居   사면에 인가라고는 하나도 없고,
        高墳正嶕嶢   높은 무덤들이 우뚝삐뚝 솟아 있다.
       馬爲仰天鳴   말도 하늘을 보며 울고
       風爲自蕭條   바람도 서글프게 분다.
       幽室一已閉   무덤 구멍 한번 닫히면
       千年不復朝   영원히 아침을 다시는 못 보리라.
       千年不復朝   영원토록 아침을 다시 맞이하지 못하리니.
       賢達無奈何   현인이나 달인도 어찌할 수 없어라.
       向來相送人   여태껏 나를 전송해 준 사람들도
       各自還其家   저마다 집으로 돌아간다.
       親戚或餘悲   친척이 더러 혹 슬퍼해 주고
       他人亦已歌   어떤 이들은 다시 만가를 부르기도 한다.
       死去何所道   하나 이미 죽은 나는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託体同山阿   몸을 맡기어 산의 흙과 동화되고 말리라

​ 만가挽歌란 상여를 메고 장지로 향할 때, 혹은 시신을 매장한 뒤 흙을 다지면서 부르는 노래다. 다른 이들이 망자를 애도하는 노래이건만 도연명陶淵明은 스스로 <만가> 세 수를 지었다.

 정묘년 (丁卯 AD427년)9월, 그는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죽기 며칠 전, 자기 손으로 제문(<자제문自祭文>)까지 지었다.

 

​ "때는 정묘 9월, 하늘은 차고 밤은 긴데 바람기운은 삭막하기만 하다. 큰 기러기들은 날아가고 초목들도 누렇게 시들어 떨어진다. 도陶 아무개는 임시로 몸담았던 객사〔逆旅之錧〕에서 물러나 바야흐로 영원한 본연의 집〔永歸於本宅〕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정든 이들은 슬피 우는데 나는 오늘 밤, 떠나는 나의 길에 제사를 지내고자 한다."로 시작되는 <자제문>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76향 313字로 지면이 허락되지 않아 총 90자인 <만가>를 가져왔다.

 그때가 아니고서는 실감이 나지 않던 일들이 요즘 한둘씩 마음에 와 닿곤 한다. 이제는 하루도 반일半日, 어느새 날이 저문다. 연한 청회색으로 물들어가는 거실 창밖의 어둠을 우두커니 지켜보는 낙樂. 하루가 닫히는 그 빛깔에 몸을 맡겨 어둠에 누우면 나는 곧잘 거기가 황폐한 들판인 양 시신으로 눕는 기분이 들곤 한다. 밑에서 흡수해 들이는 어떤 기운, 내 몸은 땅속에 이끌려 따습고 보드라운 손길에 감싸임을 느낀다. 몸은 서서히 해체되어 수분은 땅속으로 흐르고 체온과 호흡은 공중으로 흩어진다. 불가에서 말하는 오온五蘊의 해체를 자신에게 적용해 본다. 결국은 흙 한 줌이다.

 지난해 조성한 가족묘원(墓苑), 화장해 모신 어른들의 유해를 한지에 싸서 맨흙에 그대로 묻었다. 보다 빨리 흙과 동화되기를 바라면서. 나 또한 그렇게 되어가는 과정을 상상해보게 되는 것이다.

 도연명은 <만가> 1, 2에서 ​미리 죽어보는 자의 심정을 담담히 피력하고 있다.

 엊저녁엔 같은 사람이었으나 오늘 아침은 명부에 이름이 있더라. 시체는 텅 빈 관속에 있고 애들은 아비 찾아​ 우네. 전에는 없어서 못 마셨던 술이 공연히 잔에 넘치네. 안주 수북한 상을 내 앞에 두고 벗들 곡하여 우네. 생전에 주었더라면 하는 그의 아쉬움이 딱하기만 하다. 그는 늘 배가 고팠다. 그가 살던 동진東晋시대는 왕실의 세력이 약화되고 신흥 군벌이 대두하여 각축을 벌이던 난세亂世였다. 전란과 흉년으로 생계가 막연하니 밥이나마 해결하려고 출사와 은퇴를 다섯 번씩이나 반복했다. 그러나 그의 천성도 벼슬살이에 맞지 않았다. 무도한 유유劉裕는 공제恭帝를 유폐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송宋이라고 했다. 그의 손길을 뿌리치지만 않았어도 기아를 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도道가 없은즉 물러나,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고궁절固窮節을 지켰다.

 "가난한 내 집, 클 필요 없고 누울 잠자리 터전 있으면 족해."라던 그분의 안빈낙도安貧樂道로 나는 내 가난을 다스릴 수 있었다.

 동쪽 울타리 밑에 핀 국화꽃 꺽어 들고, 멍하니 남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노인, "산기운 저녁나절에 좋고, 나는 새도 함께 돌아오네. 이 가운데 참뜻이 들어 있으나 따져 말하려 해도 이미 말을 잊어버렸노라." 던 득의망언得意忘言한, 대상과 나의 간극이 없는 지경. 그는 이미 자연과 둘이 아니었다. 내 몸을 이 세상에 맡기고 살 날도 얼마나 될지? 하나 대자연의 섭리를 좇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모름지기 천지조화의 원칙에 따라 죽음의 나라로 돌아가자! 천명天命을 감수해 즐긴다면 그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일 것이냐."고 자답한다. 그렇다. 늙어 죽거늘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나는 이 은일의 시인을 찾아 시상이라는 작은 마을을 찾아간 적이 있다. 도씨陶氏의 집성촌은 추색 짙은 잡초 속에 벽돌집만 띄엄띄엄 있을 뿐, 올려다본 하늘은 아득하게 푸르고 퇴락한 민가民家는 쓸쓸하다. 1,600여 년전, 도연명은 바로 이곳에서 63세의 나이로 하세下世했다. 밤은 길고 바람기운은 삭막한데 홀로 죽음과 대면하여 <자제문>을 쓰던 기분의 모습이 떠올랐다.

 "흙으로 돌아간 나는 결국 흙이 되어 없어져 아무것도 없는 공空으로 화하고, 또 사람들 기억에서도 멀어져 아득해지고 말 것이다. 내 무덤에는 봉토도 안 할 것이며 비석도 세우지 않은 채로 세월과 더불어 스러지게 하리라," 던 그분의 말씀이 사나운 바람처럼 들판에 선 내 가슴속을 훑고 지나갔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