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도(文字圖)/박양근

 

하늘은 언제나 맑다. 눈이 내린 산야나 사막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은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밤공기가 차가워진 까닭이라기보다는 하늘을 쳐다볼 때면 사람들의 눈동자가 맑아진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세한도 같은 순간을 만나면 구름 같은 일상이 고깝고 구름 같은 자신마저 미워지게 된다.

 7년 전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의 겨울 황야를 밤새워 달리던 때다. 예상하지 못한 폭설로 차는 굼벵이였다. 생리작용은 어쩔 수 없어 밖으로 나와 오줌발을 얼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막의 밤하늘에 펼쳐진 별자리를 둘러보던 나는 갑자기 온몸에 전율을 느끼면서 휘청거렸다. 별 무리가 무엇일까 눈여겨보려는 의욕은 사라지고 평범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과 분별심마저 일순간에 증발되어 버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늘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지에 대한 절망,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행복이기도 했다. 그래서 바지의 지퍼를 끌어올리는 것마저 잊은 채 아주 오랫동안 이스터 섬의 석상이 되었다. 그 무지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별자리를 쳐다보게 한다. 

 작년에는 호주의 중심부에 자리한 사막을 횡단했다. 그때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며칠 동안의 행군 끝에 숙영지에 다다른 나는 침낭 속으로 몸을 구겨 넣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몸의 수분이 충분히 남아있지 않은 탓에 소변이 마렵지 않았지만 살구를 깨물었을 때처럼 다시 눈이 시어졌다. 이내 축축해졌다. 갈색 관목 숲 위에는 불티 같은 무수한 별이 박혀 있고 별똥별이 심심찮게 떨어지는가 하면 인공위성이 큰 빗금을 밤하늘에 가르고 있었다. 북반구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경을 지켜보면서, 지평선까지 뻗친 천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영육은 이내 무지의 탈수증에 빠져 버렸다. 죽음 같은 절망이었다.

 이틀 후, 원시인들이 지구의 중심으로 숭배하는 에어즈락에 다다랐다. 거기서 인류가 태어났다고 그들이 믿는 바위산의 둘레는 이십 리가 넘었다. 곳곳에 뚫린 동굴에는 원시적인 생활을 보여주는 상형 그림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태양 동심원, 강처럼 흐르는 곡선, 화살처럼 그려진 빗금​…. 이것들은 우리나라에 산재한 암벽화와 흡사하고 7년 전에 보았던 그랜드 캐니언의 별자리와 비슷하기도 했다.

 ​한 해를 걸린 봄 향기에 홀려 지리산 도인촌을 찾아갔다. 십여 년 전에 원로 문인들의 모임에 따라갔을 때보다 모든 시설이 말쑥하게 바뀌어도 곳곳에 세워진 솟대에는 세월의 때가 제법 쌓여있다. 징을 치고 들어가는 절차도 여전하여 믿거나 말거나 했던 선사들의 고담준론이 다시 울려오는가 싶은데 세풍에 아랑곳하지 않는 한철 매화는 난분분 떨어져 길섶 여백에 선홍빛 별자리를 그려낸다. 봄 한가운데서 마감한 박명의 꽃잎이 말을 건넨다 싶어 손바닥에 얹어본다.

 일행과 떨어져 초가지붕 모양을 얹은 민속 박물관에 들렀다. 솟대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오르는 순간 계곡의 물 소리가 나를 반겨준다. 주차장의 시끌벅적한 여음이 없지는 않으나 가청 거리 밖으로 밀려난다.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듣고, 마음이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풀이하는 것이다. 입구에는 봄날 햇살을 담청색으로 되쏘는 장독이 잃어버린 고향 추억을 가득 담은 채 놓여있고 너와집 지붕 위에는 세월에 묵은 이끼가 조용하게 봄기운을 돋우고 있었다.​

 그때 낯익으면서도 낯선 도형이 시선을 붙잡는다. 크고 작은 조약돌로 만들어진 원형 무늬다. 팔괘와 동심원의 모양으로 놓여진 돌은 손가락 마디보다 작지만 태풍이나 폭우에도 개의하지 않을 무게를 지니고 있다. 묵언의 언어랄까, 사유의 침묵이랄까. 정상에서 굴러 내려와 제자리로 돌아온 귀거래사의 정수로서, 아니면 태고의 바다에서 솟아 이곳으로 옮겨진 인연의 촉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이라도 원심력을 주면 빙글빙글 일어나 나비의 무리로 소생할 것 같기도 하다.

 만다라다.

 어릴 적부터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침마다 찾아가는 조그만 법당에는 주청홍색으로 그려진 화려한 그림이 위세를 부렸다. 흐린 날에는 어두컴컴해진 실내를 기괴하게 밝히는 불꽃이 되는가 하면 청명한 날에는 현란한 추상무늬로 내 머리를 어지럽히기도 했다. 빨간 연꽃 위에 잔잔하게 그려진 불상들은 동자석처럼 평안하긴 하였다. 그러더라도 카랑카랑한 음성과 향불 향기가 밴 오채현란五彩絢爛​한 구성은 항상 호기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그것이 우주의 본질과 생명의 진수를 상정하는 원형 바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누구에게든 그의 삶을 이끄는 나침반이나 지렛대가 있게 마련이다. 그 힘을 빌어 느낌과 앎의 배움을 조화롭게 아우르면 너와 나의 경계선이 사라지고 무인칭의 실존만 남게 된다. 이처럼 내 삶에서 만다라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문자도다. 지금 돌아보아도 크레다 섬의 미궁에 갇힌 신세 같지만 그것이 내 삶을 그나마 끌어가는 끈이어서 고맙기만 하다.

 요즘 나는 별자리에서 일깨운 문양을 다른 곳에서 찾곤 한다. 유전자 지도며 동식물의 세포 그림을 들여다보거나, 문양을 가진 돌도 나름의 생명 지도를 가지고 있을 거라 꿈꾸기도 한다. 세상은 문자와 기호로 엮어진 지도이고 우주는 만다라라는 생각도 해본다. 작가는 문자도에 얹혀 기어가는 달팽이 순례자가 아닐까 싶다. ​

 이 문자도를 어디에서 한 번 더 떠올릴 수 있을까. 태평양 무인도면 아주 좋겠다. ​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