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눗방울에 갇힌 남자 / 조이섭

 

비눗방울이 하늘로 올라간다. 무지개를 아로새긴 크고 작은 방울 안에 한 남자가 오도카니 앉아 있다. 바이러스라는 미물에 굴복하여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 종아리를 감싼 두 손으로 깍지를 낀 채 웅크리고 있다.

나는 얇디얇은 비눗방울을 방패 삼아 인류라는 범주로 뭉뚱그려지지 않는 단독자(單獨者, Der Einzelne)가 되어 완벽한 자폐에 빠져든다. 비눗방울에는 유(有)와 무(無)만 존재할 뿐, 균열이 없다. 문(門)도 따로 없어 드나들지 못한다. 만물의 영장이라 거들먹거리던 남자가 그 속에 갇혀 있는 허망한 꼴이라니. 투명한 막을 버티는 미미한 표면장력을 믿고 숨어든 모습이 처량하기 짝이 없다.

봄부터 코로나 19 공습이 시작되었다. 꽃 천지를 기다리던 마음과 산하를 갈빛으로 꽁꽁 묶어놓고 엄청난 기세로 공격을 퍼부었다. 오가는 교통이 줄어든 휘휘한 시가지에는 환자를 실은 119구급차만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동서남북으로 내달렸다. 그 서슬에 길녘에 비켜 서 있던 플라타너스는 움찔거렸고 세상 구경하러 나오려던 연둣빛 새 움은 기지개를 켜다 말고 자지러들었다.

시민들은 도시 폐쇄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지레 문고리를 잠그고 그 속에서 새가슴을 할딱였다. 기세가 오른 코로나 19는 인간을 밀폐된 공간에 가두어 놓고 ‘인간이 지배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는 야욕을 감추지 않았다. 인간들에게 일상을 허락하지 않고 제왕처럼 군림하던 코로나가 석 달여 지나자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공간의 개폐권과 출입권조차 빼앗긴 처지에서 들고 나는 자유를 겨우 허락받았다.

다섯 살배기 쌍둥이 손녀를 데리고 월드컵경기장 광장으로 바깥바람을 쐬러 나갔다. 경기장 주변은 나무를 베고, 숲을 밀어붙여 난 생채기를 시멘트로 메꾸어 회색빛 일색이다. 삼라(森羅)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편견에 더해, 인간이 만상(萬象)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아집까지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지만, 쌍둥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겨울 같은 봄이 다 가도록 방 안에만 갇혀 지내다 해방된 나들이가 좋은지 이리 뛰고 저리 내달린다. 머리카락이 함빡 젖도록 햇살로 목욕한다.

잠시 후 쌍둥이는 엄마 아빠와 함께 비눗방울 놀이에 빠져든다. 플라스틱 분사기가 밤톨 크기, 탁구공만 한 비눗방울을 쉴 새 없이 만들어 낸다. 비눗방울 만드는 방법도 세월 따라 변하는가 보다. 내가 어릴 적, 누런 보리 짚을 비눗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불어 만들었던 소담한 비눗방울이 아니다.

“할아버지, 비눗방울에 무지개가 떴어요!”

나비처럼 춤추는 무지개 방울을 좇아가는 쌍둥이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실눈이 시리다.

무지개를 품고 있는 비눗방울은 태생적으로 상승 기류를 타고 위로 또 위로 간다. 사람들은 온 세상의 시름과 오염도 함께 비눗방울에 실려 날아가리라 기대한다. 그래서 종이비행기든 풍선이든 풍등(風燈)이든 하늘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쉽게 동심으로 돌아가 기분이 들뜬다. 소지(燒紙)를 살라 하늘로 올려보내며 부정을 없애 달라고 빌기도 한다.

비눗방울은 그 안에 공기를 담고 있는 둥근 모양의 비누 필름층이다. 이 필름의 두께는 거의 빛의 파장에 가까워 도달한 빛 일부는 바깥층에서 반사되고 일부는 안쪽에서 반사된다. 이 두 개의 반사광이 서로 간섭해 무지개의 일곱 색을 만든다.

인간도 일곱 가지 색깔, 칠정(七情; 喜怒哀樂愛惡慾)으로 만든 무지개를 하나씩 품고 있다. 사랑의 씨줄과 미움의 날줄로 직조한 색동무늬는 제각각의 삶이다. 누구의 무늬는 빨간빛이 많고 누구는 보라색 투성이다. 또 다른 이는 무늬조차 만들지 못하고 얼룩으로 남기도 한다. 그게 부끄러워 비눗방울 안에 숨어들어 자기 눈과 귀를 가리기 바쁘다. 바깥에서는 사냥꾼이 머리만 덤불에 들이밀고 있는 사슴 보듯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갇힌 자들만 모르고 있다.

코로나가 만든 밀폐된 비눗방울에 갇힌 나도 지나온 삶을 반추해 본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평생 꿈만 꾸며 살았다. 급한 마음에 가까운 사람들의 가슴에 면도칼로 상처를 내고 심지어 가족에게도 날카로운 송곳을 들이댔다. 허상을 좇아 헛손질하고 쓸데없는 물욕, 명예욕을 비눗방울에다 실어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다가 제물에 녹초가 되기도 했다. 그 무거운 것들을 싣고 어찌 벽공(碧空)에 오를 생각을 하였는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제 와서 회한에 젖은 눈물을 글썽여도 ‘내가 태어난 이유’와 ‘지금 이 자리까지의 귀결’을 설명하지 못한다. 내 삶의 마지막이야 코로나가 거두어도 좋고, 부지불식간에 하늘이 불려 간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다만 일상의 즐거움과 맞바꾼 비눗방울에 갇혀보니 인생이란 하늘에 다다르기도 전에 무화(霧化)하는 허망한 존재임을 알겠다.

요즘 들어 유별스레 푸르른 하늘로 비눗방울 풍선이 올라간다. 바이러스가 강제(强制)한 인간의 겸허함이 지구를 잠시 쉬게 한 모양이다. 쌍둥이의 웃음소리를 타고 아들 녀석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문득 고개를 돌려 쌍둥이 보느라 갇혀 사는 것이 지겹고 힘들지 않으냐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언젠가 내가 너희들에게 짐이 되겠지만, 힘을 보탤 수 있는 지금이 고맙고 편하다.”

짧은 대화 끝에 아들의 따뜻한 눈빛과 마주친다. 기저 질환이 있는 나더러 외출이나 다른 사람과 만남을 삼가야 한다고 전에 없이 곰살가운 걱정까지 건넨다. 자식에게 부모란 일상 속의 정물(靜物)이었을 것이다. 아무 일 없을 때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던, 봐도 그만 아니 보아도 그만이던, ‘가족’이 시련과 고난을 덮어주고 감싸주는 ‘보자기’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미물인 바이러스가 가족의 소중함을 부자(父子)에게 새삼 일깨워준다. 마음을 열면 세상에 스승 아닌 것이 없다.

절대 순수가 도달할 궁극점은 ‘존재하지 않음(無)’이다. 꼬이거나 뭉친데 하나 없는 순수함으로 가득 찬 쌍둥이의 비눗방울이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나도 가시에 찔려 “팡” 하고 가뭇없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깨끗해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비눗방울에 갇혀 독존(獨存)을 꿈꾸는 남자는 더 맑아져야 하리. 햇살 가득한 오늘처럼 더 가벼워져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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