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에 담긴 꽃 한 묶음 / 존 버거

괜찮을 거라고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전에도 종종 그랬듯 마치 내게 무슨 신비한 것이 있기라도 한 양, 또 동시에 내가 바보이기라도 한 양 나를 바라보았다.

마르셀은 거의 여든의 나이였다. 힘겨운 삶을 살았지만 인생의 삼분의 일 정도는 행복했을 것이다.

해마다 넉 달은 소와 함께 알파주(알프스 지방의 산간 목초지-역자)에서 보냈다. 인생의 삼분의 일을 해발 천칠백 미터 고도에서 보낸 것이다. 철벽 같은 산의 장막에 둘러싸여 그는 평화를 누렸다. 내가 바보처럼 말하는 그 행복 말이다.

산에서는 개 두 마리와 암소 마흔 마리 정도, 그리고 수소 한 마리와 함께 살았다. 친구들이 찾아오면, 마을 사람들 소식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즐겨 물었다. 마치 사람들이 엊저녁 텔레비전 연속극 내용을 묻는 것처럼 그렇게 묻곤 했다.

그의 진정한 삶은 그 산 위에 있었다. 오두막이 자리한 평평한 바위턱을 스쳐 지나가는 낮과 밤, 계절과 햇수들의 그 끝없는 흐름 위에, 어김없고 하릴없는 일상을 띄우면서, 또 치즈를 만들면서.

바위턱에서는 번갯불이 가까이에서 흩어졌고, 마치 다리를 건너는 사람에게 다리 아치가 내려다보이듯 무지개가 내려다 보였다.

산 위에 조금만 있어 보면 외롭다는 생각은 사라진다. 발가벗고 살기 때문에. 발가벗은 사람은 또 다른 차원의 동반자가 함께 있음을 알게 된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물론 마르셀이 옷을 벗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밤에도 옷을 입은 채로 잔다. 그럼에도 알파주에서 혼자 한 주 두 주 지내다 보면, 영혼은 그 윗도리를 벗기 시작하고 이윽고 알몸이 되면서,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의 눈에서 그것이 읽힌다.

영혼은 그렇다 쳐도, 가축들이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늘 있었다. 두 마리 개가 소들의 이름을 죄다 알고 있을 정도지만, 그럼에도 소가 길을 잃거나 다리가 부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곳 산에서는 개연성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소나무숲이 지금 막 걸음을 멈춘 것처럼 여겨질 때가있다. 은하수가 마치 모기장처럼 가깝게 보일 때도 있다. 어느 8월 아침에는 우유 짜는 헛간에서 똥 치울 때 쓰는 외바퀴차의 손잡이가 얼어 버리기도 한다.

갈라지고 닳고 마디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마르셀의 손은 아주 따뜻했다. 굳은 살갗 밑에 예민함을 감추고 있었다. 마치 이제는 쓰이지 않게 된 옛 단어들 같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함께 신년을 맞은 후 차로 그의 집까지 바래다주었을 때였다. 그때 벌써 소들을 데리고 알파주로 올라갈 6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렴 그리 될 거라고 나는 말했다. 그는 마치 메아리가 되돌아오는 바위 앞에 선 사람이 그러듯,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머리를 저었다.

지난 6월, 마르셀의 산으로 다시 가 보았다. 풀 뜯는 소도, 종소리도, 개도 없었다. 이름 없는 들꽃들만 무성했다. 무심히 꽃을 꺾기 시작했다. 이런 고도에서는 같은 꽃이라도 들판에서보다 훨씬 선명한 색깔로 핀다. 근처 봉우리들엔 갈가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 페러글라이더가 스무 개 정도 떠 있다. 상승기류를 타고서, 뛰어내린 산모퉁이보다 더욱 높이 올라간다. 이즈음 그 자리는 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으로 통한다.

마르셀의 빈 오두막 문을 밀었다. 기차의 칸막이 방만한 방이 둘 있다. 나는 속으로 번져 가는 감정을 누르며, 유리잔에 물을 채우고, 한 묶음 손에 들고 간 꽃을 꽃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하루가 저물 때면 거기 앉아 나는 커피를, 마르셀은 우유를 마시곤 했었다. 그가 가 버리고 없는 지금, 그 의자에 다시 앉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소떼들의 종소리 뒤로 고함치며 욕지거리하며 다가오는 마르셀의 목소리가 저 정적 속에서 들려 올 때까지, 나는 거기 가만히,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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