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며 피운 꽃


                                                     미사 신금재


(이 글은 샘터 2014.5월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그가 처음 캐나다로 이민을 가자고 하였을 때 내 느낌은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하는 생각이었다.

신혼 초부터 그는 미국에 있는 닭공장에 서류를 넣고 기다리곤 하였으니까.

두 살 차이나는 남동생은 누나, 이제는 분양받은 아파트에 들어가서 좀 편하게살지.

이민은 무슨 이민이람

침묵에 잠긴 친정어머니의 눈물어린 목소리를 뒤로 하고 우리는 당시 중학생이던 아이들 둘을 데리고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나는 학교다닐 때 영어성적이 제일 좋았으니 그럭저럭 영어소통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도착한 지 보름만에 얻은 직장, 데이케어-어린이집--에서 보기좋게 

실수를 연발하면서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보이지않는 유리벽이 있다고 하더니 영어도 잘 안되지, 캐나다 동부 쪽에서 온 유럽 정통 이민자들의 

높은 코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영국에서 온 매니저의 발음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민와서 십 여년 넘게 근무해온 직장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해고통지도 없는 해고였다.

버스 종점에서 내린 그 여름날 햇살은 얼마나 투명하던지 도무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 흔들리며 종잡을 수 없었던 불안감의 종착역은 바로 해고였다.

가족들에게 무어라고 설명하나.

아침에 일어나면 뚜렷이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하였다.

무작정 산책로를 걷고 또 걸었다.

때이르게 나온 잠자리들을 따라가고 정처없는 발걸음으로 이국의 구름들을 따라 걸었다.


무언가 나를 위하여 다른 길을 주시겠지.

그동안 유아교육에 몸 담아온 지 이십 여년, 정녕 내가 할 새로운 일은 무엇일까.

그렇게 한 달여 남짓 무작정 걷던 어느 날 구름 사이로 한 점 햇살이 비쳐졌다.


캐나다는 일하는 엄마들을 위하여 정부시책으로 데이홈을 장려한다.

일종의 소규모 데이케어로 집에서 할 수 있는 스몰 비즈니스인데 정부 장려금을 주면서 데이홈 활성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추세이다.

그래, 다시 데이케어로 돌아가기보다 내 스스로 데이홈을 차리자.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슬슬 산책로를 걷던 내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데이홈 창업을 도와주는 에이전시 사무실에 전화를 하고 방문 날짜를 받았다.

아랫층으로 내려가 창고처럼 쓰던 방청소를 시작하였다.


에이전시와 계약이 이루어지고 마침내 9월 학기 아이들 접수를 받기 시작하였다.

여섯 명 정원에 세 명의 아이들이 등록을 하였다.


한국인이 한 명도 없던 직장에서 마음고생을 하며 하루하루 보내던 그 시절과 달리 아이들 프로그램을 

스스로 만들어 한국문화도 전해주는 지금이 참으로 평화롭기만하다.

음악놀이를 주요놀이로 하면서 사물놀이로 마칭 밴드를 하는 아이들.

처음에는 꽹과리 소리에 귀를 막던 아이들이 지금은 서로 하겠다며 손을 내민다.


북소리에 덩실덩실 춤을 추는 아이들 모습 뒤로 한낮의 햇살이 정겹기만한데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가슴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달래본다.

힘내자, 비록 다른 나라에서 살아도 우리 한민족의 흥겨운 문화로 즐겁게 살아가자고.

그리고 더는 흔들리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