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의 힘 / 정선모

 

 

 

긴긴 겨울이 가고, 다시는 찾아올 것 같지 않던 봄이 스멀스멀 연기처럼 발밑으로 스며들더니 마침내 벚꽃이 만개했다. 겨우내 움츠려 있던 마디마디 관절이 저절로 기지개를 켜댄다. 봄비가 촉촉이 내린 날, 모처럼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뒷산에 올라 산책길로 들어섰다. 둘레길이라 이름붙인 그 길은 산 아래쪽에 빙 둘러 평지처럼 길이 나 있어 아무리 걸어도 숨이 차지 않아 즐겨 걷는 곳이다.

계곡이 시작되는 곳에 놓여 있는 작은 다리를 막 지나려는데 뭔가 푸른빛이 선명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축대를 쌓아놓은 곳에 이끼가 가득 자라고 있다. 십여 년을 오르내렸어도 거기에 이렇게 어여쁜 이끼가 자라고 있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다. 생각해보면 울창한 숲속을 오르내리며 주로 눈이 갔던 나무들은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거나 혹은 아름다운 빛깔로 물드는 활엽수였다. 하늘 높이 치솟으며 자라는 나무는 듬직해 보여 오며가며 쓰다듬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끼에 눈이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새벽녘에 내린 비 때문인지 초록색 융단처럼 깔린 이끼에 물방울이 가득 맺혔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친 햇살이 그 물방울에 닿자 저마다 영롱한 보석처럼 반짝인다. 늘 다니던 길목에서 발견한 새로운 정경을 넋 잃고 바라본다.

누가 뒷덜미를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몇 발자국 걷다 되돌아와 다시 이끼 앞에 섰다. 고개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고물고물한 이끼들이 시멘트 축대 위에 촘촘히 박혀 있다. 큰 나무도 툭툭 쓰러지고 부러지는 그 혹독한 추위에도 얼어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남아 제빛을 발하고 있는 작디작은 이끼의 생명력에 할 말을 잃는다.

손으로 가만히 쓸어보니 부드러우면서도 약간의 저항이 느껴진다. 옷감처럼 한 결로 이루어진 듯 보이지만 수많은 개체가 모여 있다. 작은 것은 무리를 지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이끼를 보며 새삼 깨닫는다. 혼자서는 일어설 수조차 없는 힘없는 존재들이 서로 어깨 기대어 함께하면 빙하가 있는 곳에서도 살아낼 만큼 강인함을 지닌다.

식물 중에 가장 먼저 생겨나서, 가장 오래 살았으며, 지구상의 어떤 곳에서든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끼라고 한다. 그토록 오랜 세월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낮고 낮은 자리에서 최소한의 형태를 유지하며, 더할 수 없이 단순하게 존재하는 방식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물처럼 엉켜있는 헛뿌리로 나무껍질이든 돌멩이든 움켜쥐고 잎을 밀어 올린다. 이끼의 삭이 터지면 그 안에 가득 들어 있던, 먼지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포자들이 사방팔방 퍼져 나가 새로운 터전을 일군다. 그러면 그 품 안에 또 다른 생명이 스며들어 살아간다. 빽빽하게 밀식된 이끼 속에 개미보다 작은 벌레가 어른거린다. 있을 것은 다 있고, 해야 할 일은 어김없이 해내는 생물이다.

아무래도 오늘의 산책은 접어야 할 듯하다. 그 대신 이끼를 찾아 나선다. 관심을 가지니 길옆 바위 한 귀퉁이에도,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나무 밑둥치에도 영락없이 흙처럼 엎디어 자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조금 떼어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살핀다. 좁쌀처럼 작은 잎이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듯 앙증맞고 귀엽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이끼를 밟아 미끄러질 뻔하였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이끼를 밟고 다닌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아니, 생명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오늘 그 빛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그저 음습한 곳을 좋아하는 세균 같은 존재로 치부하고 있었을 것이다.

큰 나무들이 울창한 숲속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나름대로 고개 빳빳이 들며 살고 있는 이끼에서 또 하나의 스승을 본다. 이끼는 다른 식물이 자랄 환경을 마련해주고도 생색조차 내지 않는다. 자신의 몸보다 몇 배 혹은 몇 십 배나 되는 물을 저장하여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영리함을 지녔으면서도 잘난 척을 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본분만큼 열심히 살아낼 뿐이다.

은하수의 별처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게 어디 이끼뿐이던가. 지구도 무변광대한 우주에서 보면 이끼처럼 작은 존재인 것을. 그 작은 별 안에서 60억 인구가 고물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그러니 만물의 영장이라 자랑하지 말 일이다. 결국 너도나도 보이지 않는 이끼의 한 포자에 불과할 따름인 것을. 그러나 그 포자가 바위를 덮고 산을 덮고 이윽고 지구를 덮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끼의 헛뿌리, 그 실처럼 가녀린 뿌리 하나가 우주를 지탱하고 있음을 알겠네. 짓밟혀 으깨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그 힘처럼 어떠한 재난이 닥쳐와도 견디며 살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겠네.

이끼 위로 하롱하롱 벚꽃잎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이끼한테는 벚꽃잎 한 장의 무게가 바윗덩이처럼 무거울지도 모르겠다. 숨죽여 견디다 보면 바람이 불어 데려갈지도, 제풀에 말라 떨어져 내릴 때도 있겠지. 가볍디가벼운 꽃잎 하나 어쩌지 못하면서도 지구의 온갖 재해 다 이겨내고, 지금 이 순간 푸르게 빛나고 있는 이끼가 경이롭기 그지없다.

다시 이끼를 본다. 들으려고 하니 들리고, 보려고 하니 보인다. 아무리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다 존재 이유가 있는 법. 생명은 사랑으로 존재하고 사랑은 존재를 빛나게 할지니 나 또한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빛깔과 향기를 지닌 존재 아니던가.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고 한탄하지 말고, 어깨 활짝 펴고 세상을 향하여 다시 힘차게 걸어 나가볼 일이다. 누가 알겠는가. 앞으로 나에게도 보석처럼 영롱한 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