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맞이하는 산 / 염정임



겨우내 산을 찾지 못했다. 잡다한 일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어딘가에 와 있을 싱그러운 봄기운을 느끼고 싶었다. 아침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긴 했지만 3월의 마지막 날이라 어쩌면 나비소식, 제비소식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산으로 오르면서부터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바람은 억새풀들을 모로 눕히고,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차고 매운바람이 아니라, 그 속에는 잠자는 대지를 흔들어 깨우려는 듯한 부드러움이 숨겨져 있었다.

바람은 나에게도 불어와 머리칼이건 옷깃이건 마구 휘날려 놓고 달아났다. 마치 나를 깨어나게 하려는 듯, 모든 미망(迷妄)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듯…….

능선에 올라서니 반대편 계곡으로부터 검은 구름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이윽고 진눈깨비 같은 차가운 것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면서 눈송이는 점점 커져서 꽃잎처럼 금방 녹아 없어져갔다. 나는 잠시 수많은 벚꽃 잎이 떨어져버리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혔다. 어릴 때 진해에서 본 그 벚꽃 천지, 알싸한 향기…….

겨울이 주는 마지막 선물일까. 나는 자연의 돌변한 모습에 어지러워 자꾸만 헛발길을 내딛고, 멀미하듯 무언지 몽롱한 기분이 되어갔다. 그렇다. 그건 수천 수만의 흰 꽃송이였다. 흰 안개꽃, 싸리꽃, 벚곷……. 산은 조용히 겨울을 보내며, 눈꽃의 축제를 열고 있었다.

일시에 산은 겨울산으로 변한 것 같았다. 가지마다 조금씩 눈이 쌓이고 건너편 산등성이도 희끗희끗 변해갔다. 봄이 모기가 이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땅 밑에서 한창 물을 길어 올리던 나무뿌리. 기지개를 켜던 작은 짐승들도 놀라서 모든 생명의 몸짓을 유보한 듯 산은 조용하기만 하다. 하산할수록 조금씩 눈발이 뜸해지더니 어느 틈에 눈은 멎어 있다.

숲을 벗어나 큰 길로 나오니, 비온 뒤처럼 땅은 젖어 있고 어느 틈에 햇살이 비치고 있다. 계곡에서는 물소리도 활기차게 들린다. 말없이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이지만 지난 겨울 동안 추위와 싸우면서 얼마나 인내하며 존재하기 위해 몸부림쳐왔을까.

이 산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벌레들, 날짐승들, 이들 모두는 목숨을 건 투쟁 끝에 살아남았으리라.

오래 전에 읽은 미우라 아야코의 자서전이 생각난다. 그녀는 젊은 시절을 척추 카리에스로 7년 동안 기브스 베드에 누워서 지냈다.

겨울이 지난 어느 날 그녀의 방에 날아온 파리 한 마리를 보고, 추운 아사히가와의 겨울을 견디며 살아남은 그 파리에게서 봄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도, 폐병을 앓던 그의 애인도 이 파리처럼 가까스로 겨울을 넘겼다고 생각하며 눈물짓던 장면이 있었다.

그녀의 애인은 결국 그 봄에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후에 죽은 애인을 닮은 사람을 만나 결혼한다. 그 남자는 그녀가 결혼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5년 동안을 기다려주었다.

결혼 후에도 몸이 약한 부부는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산다. 어떤 날은 둘 다 너무 기력이 쇠진하여 나란히 누워서 하루를 보낸다 했다.

그녀는 지금 노년임에도 꿋꿋하게 강연하고 글 쓰며, 암과 투병하며 보낸다는 소식을 어디서 읽었던 것 같다.

모진 추위와 눈보라를 이겨낸 이 산에 사는 생물들은 지난겨울 동안 더욱 강인해졌을 것이다. 이제 봄을 맞이하여 분주히 생명의 율동을 시작하리라. 먹이를 찾으러 다니고,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기르고…….

산의 공기는 맑고 청량하기만 하다.

문득 까치소리가 나서 올려다보니, 마른 나뭇가지 끝에 부부인 듯한 까치 한 쌍이 날개를 파닥이며 가지 위로 날아오르며 우짖고 있다. 그 모습은 정말 생명의 환희와 사랑의 기쁨으로 약동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고통의 겨울을 이겨낸 승리의 날갯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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