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예찬 / 최민자

 

 

 

가을 바다는 쓸쓸하다. 가을 오후의 서해바다는 더 쓸쓸하다. 찢어진 텐트, 빈 페트병, 분홍색 슬리퍼 한 짝이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소나무 아래 모래언덕을 지나 이윽고 수평선을 마주하고 앉는다. 흐린 물빛, 느린 물살, 낮게 웅얼대는 해조음이 편안하다. 아직도 볼을 붉히고 밤을 맞을 줄 아는, 서녘 하늘의 부끄러움도 정답다. 지친 강물을 한 몸으로 품어 안는 해거름의 서해는 아늑해 보인다.

서해와 가을은 닮은꼴이다. 쓸쓸한 것, 고즈넉한 것, 시간이 빗장을 걸어 잠그기 전, 혼신을 다해 사르는 붉은빛까지도.

서해에서 사람들은 겸허해진다. 꽃 한 송이 피워올리지 못하는 개펄에 엎드려, 무릎을 꺾고 고개를 수그린다. 자연이 주는 것들을 공으로 얻으려면 최소한 그만큼은 허리를 굽혀야 한다는 것을, 배우지 않아도 사람들은 안다. 바지락과 박속낙지, 어리굴젓 같은 서해안의 먹기리들은 모두 그렇게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허리를 굽힌 사람들이 뻘밭에 엎드려 건져 올린 것들이다. 물과 물을 매몰차게 가르지 않고 질펀하게 품어 안는 너그러운 바다. 평화로운 안식과 소금기 어린 일상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이 바다의 넉넉한 이중성이 좋다.

젊은 날에는 동해도 좋았다.

삽상한 바람, 불끈 솟는 햇덩이, 가파른 물살, 바슬거리는 모래의 감촉이 좋았다. 서슬 푸른 동해의 파도 앞에 서면 나처럼 우유부단한 사람도 안으로 단단히 옹심이 박혀 흔들리지 않게 다져질 것 같았다. ‘희망의 나라’ 아 ‘고래사냥’ 을 흥얼거려 본 것도 동해에서였다.

사람들은 동해에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돋쳐 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굽은 등을 펴고 처진 어깨를 바로 세운다. 수평선 너머 솟는 해를 우러르며 경건하게 손을 모으거나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한다.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바다. 그 바다의 광활한 기싱이 좋았다.

동해가 남성적이면 서해는 여성적이다. 동해가 철학적이면 서해는 문학적이다. 기운 잃은 아이를 무동 태우고 걷는 아버지 같은 바다가 동해라 치면, 칭얼대는 아이를 치마폭에 감싸 안고 다독거리며 재우는 어머니 같은 바다를 서해라 할 것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질 때 나는 문득 바다를 생각한다.

피보다 붉은 변산의 낙조, 풀어진 세숫비누처럼 구름 사이로 숨어들던 간월도의 달. 만선의 꿈을 포기하지 못한 채 모래밭에 엎드려 녹이 슬어 가고 있던 왜목리의 낚시배, 체념과 희망을 동시에 품으며 물때를 기다리던 꽃지 바닷가의 따개비가 생각나다. 바다가 주는 위안이 언제부터인지 동해보다는 서해의 기억과 잇닿아 있다. 내 안의 시계바늘이 하오의 시간들을 바장이고 있어서일까.

바람 부는 가을날엔 바다로 떠나 보라. 덜 핀 억새들이 쨍한 햇살에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는 방조제 옆을 지나, 흐린 물살 일렁이는 서해로 가 보시라.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아득한 수평선 저 끝에서, 가느다란 물뱀 한 마리가 은빛의 광희로 떨고 있을 것이다. 이윽고 해가 떨어져 버리면 쓸려 나간 바다가 집 나간 아낙처럼 주춤주춤 당신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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