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빠갑빠 / 유병석  

 

 

 

지난 70년대의 어느 세월에 있었던 이야기다.

명실상부한 대학의 전임교수였지만 툭하면 학교가 문을 닫는지라 나는 실업자와 같이 집에서 뒹굴며 지내기 일쑤였다. 문을 닫는 시절이 마침 가장 화창한 계절인 4,5월이거나 생기가 나는 때인 9, 10월이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아니하고 풀 수 없는 울분이 치솟아 집에서 혼자 소주잔이나 홀짝대고 허송세월한 도리 밖에 없었던 시대. 왕빠, 깝빠, 땅꼬마, 풀떼기 등의 기발한 딱지 용어를 이때 배웠다.

아내는 돈 벌러 가게에 나가고 큰놈들은 학교에 나간 고즈넉한 오전이면 푸른 바다 넓은 백사장에서 하루 종일 게와 노니는 심정으로 네 살짜리 막내와 집을 지키며 놀았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놀 때 어른이 아이가 되어야지, 아이가 어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그놈의 말이 되어주기도 하고 구슬치기의 상대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때 막내는 딱지 치는 시간 이외의 시간은 모조리 딱지 접는 데 쓰는 판이라 접은 딱지가 박카스 상자로 가득했다. 열병들이 상자가 아니라 열병들이 상자 열 개가 들어가는 커다란 상자로 가득했다는 말이다.

딱지 중에서 모양이 앙증스레 작게 접힌 놈이 땅꼬마, 육중하고 큰놈이 왕빠라는 것이다. 왕빠 중에는 문고본 책만한 크기와 두께를 가진 놈이 있는 반면에 땅꼬마 중에는 가로 세로 1.2cm까지 다양했다. 그런가 하면 엷고 힘없는 종이로 접었기 때문에 시들시들한 것을 풀떼기라 부르고 딱딱한 무거운 종이로 접어서 땡땡한 것을 깝빠라고 했다.

말하자면 왕빠와 땅꼬마는 딱지의 크기에 의한 구분이요, 깝빠와 풀떼기는 재료의 강도에 의한 구분이다. 그리하여 박카스 상자에 가득 찬 딱지 중에는 왕빠와 땅꼬마와 풀떼기가 어지럽게 섞여 있는 것이다.

왕빠에는 풀떼기왕빠와 깝빠왕빠가 있고 깝빠에는 왕빠깝빠와 땅꼬마깝빠가 있다. '남녀노소'가 성별로 남과 여, 연령으로 노와소로 구별하여 남 중에는 노남老男과 소남小男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막내가 딱지를 붙일 때에는 가장 허약한 풀떼기땅꼬마

깝빠나 풀떼기왕빠를 대고 그래도 못 견딜 최후에 가서 비장한 왕빠깝빠를 댄다. 이때는 최후의 일전인지라 그것을 땅에 밀착되도록 여러 번 발로 눌러놓는다. 왕빠깝빠가 풀떼기와 왕빠나 깝빠를 넘기기란 차 치기처럼 쉽다. 그러나 반대로 풀떼기나 땅꼬마로 왕빠나 깝빠를 넘기기란 거의 무망한 노릇이다. 이 아비는 비록 열을 올려 딱지치기를 하지만 딴 딱지를 간수해둘 상자도 없거니와 그럴 처지도 아니어서 모두 돌려준다. 다음에 다시 딱지치기를 할 때는 언제나 적으로부터 얻어야 하는데 효도가 뭔지 잘 모르는 네 살짜리 막내는 언제나 풀떼기나 땅꼬마를 아비에게 준다.

어느 날 나와 같은 신세의 잠정 실업자 친구가 내 집에 나타나 부자지간의 이 유치한 놀이를 관전한 일이 있었다. 그가 막내에게 너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니까 대답이 '왕빠 대통령'이다. 막내에게 있어서 대통령은 되고 싶으면 되는 것이고 또 대통령은 왕빠 같은 존재인 모양이다. 왜 하필 왕빠 대통령이 되고 싶으냐고 풀떼기 같은 실업자가 물었겄다. 그 이유를 이 아비가 통역, 해설, 요약하면 요컨대 나쁜 놈 빨빨 쏴 죽이고 길에 거치적거리는 사람들을 쫙 제치고 사이드카 수십 대 앞뒤로 거느리고 기관총을 단 자동차 타고 웽 달리고 싶어서라는 것이었다.

돈 벌러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아내가 아비와 막내의 매일 하는 딱지놀이를 눈치 챘다. 딱지를 접으면 손재주가 는다는 둥 다 교육적으로 좋은 일인데 왼손으로 치는 것을 오른손으로 치도록 왜 교정하지 않느냐고 한다. 이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큰놈이 끼어들며 뇌두란다. 억지로 왼손잡이를 고치려면 강제하면 말더듬이가 된다나.

맙소사, 풀떼기 같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교육이면 세상 다 되는 줄 아는 불쌍한 아내. 그래서 자식들 교육 때문에 즐거이 파김치 되는 아내, 지식이면 세상 다 되는 줄 아는 순진한 큰 놈, 글자로 종이에 박힌 것이면 모두 옳은 것인 줄 믿어 의심치 않는 큰놈, 왕빠깝빠면 세상 다 되는 줄 아는 막내만 못한 사람들은 아닐까.

이 세상은 막내의 딱지 상자다. 풀떼기와 땅꼬마와 깝빠가 무질서하게 뒤섞여 담긴 딱지 상자로 만약에 세상이 두 동강이 나서 딱지치기와 같은 싸움이 붙는다면 수십 개의 풀떼기땅꼬마가 아니라 단 한 장의 왕빠깝빠가 승리를 쟁취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왕빠깝빠의 수효가 많은 진영이 적의 진영을 이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한 명의 장군이 공을 세우기 위하여서는 수만의 병졸을 죽여야 하는 것처럼 풀떼기와 땅꼬마는 그저 있으나마나한 민초일 뿐일 것이다.

막내가 자라 유치원에 가고 학교에 들어가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어느 사이엔가 딱지치기는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헛간을 치우다가 몇 년 동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예의 딱지 상자를 발견했다.

족히 한 아름이나 되는 종이들을 처분할 길은 태우는 것밖에 없었다. 벽난로에 이것들을 하나하나 집어던지면서 소리 없이 타는 모양을 구경하며 한동안 앉아 있었다. 인생들의 종명終命을 지켜보고 있는 기분으로.

죽음에 있어서도 역시 깝빠와 풀떼기는 같지 아니 하였다. 풀떼기는 푸시시 검불처럼 제대로 불꽃도 내지 못하고 금시 스러지지만, 깝빠는 나뭇조각처럼 제법 불꽃을 뿜으며 한동안 장렬하게 버티는 것이었다.

깝빠와 왕빠와 풀떼기와 땅꼬마를 하나하나 던지면서 아내는 풀떼기, 나는 땅꼬마하고 별을 헤듯 속으로 뇌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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