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가 있던 자리 / 손진숙



 

 

나는 가난한 시골집에서 태어났다. 피아노는커녕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타조차 만져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래서 내 자녀들은 악기 한둘 쯤 다룰 수 있기를 바랐다. 결혼 후에도 취미나 문화생활이라곤 모르고 지냈다. 막내가 유치원에 다닐 나이가 되어서야 영화나 가곡 공연 관람을 즐길 수 있었다. 그즈음엔 길을 가다가도 안내 게시판에 가곡의 밤 행사 포스터가 있으면 잊지 않고 공연장을 찾았다.

어느 날, 혼자 아트홀을 향해 걸어가던 중이었다. 잠시 후 감상하게 될 성악의 매력에 미리 취해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승용차 한 대가 갑자기 달려들었다. 나는 그만 아스팔트 길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병원으로 실려 갔다. 의사가 엑스레이 결과를 보더니 광대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수술 받고 치료하는 데 꼬박 4주가 걸렸다,

퇴원 후, 한약방을 경영한다는 여자 운전가가 집으로 찾아왔다. 보약을 지어먹으라며 위로금을 건넸다. 보험회사에서 준 합의금을 합해 피아노를 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딸이 피아노를 마음껏 연습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서였다.

첫아이인 딸은 취학할 나이에야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교본을 보며 멜로디언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흉내를 내곤 했다. 피아노를 사줄 형편이 여의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어 오던 참이었다. 이런 기회를 계기로 큰맘을 먹었지만 위로금과 합의금을 합해도 턱없이 모자랐다. 살림을 하면서 한 푼 두 푼 모은 비상금을 보탰다. 그때 마침, 이웃에 사는 내 또래 요한 엄마가 피아노를 함께 사자며 제안을 해왔다. 근처 악기점보다 서울에서 지인을 통해 싸게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시내 피아노점에 가서 가격도 적당하고 마음에 드는 모델을 골랐다. 그녀가 나서서 서울에 주문했다.

피아노가 거실 한쪽 벽 앞에 자리를 잡던 날, 내 심장은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듯 쿵쾅거렸고, 내 마음엔 건반에서 신비한 소리가 울려 나오듯 황홀한 떨림이 일어났다. 딸아이는 피아노 학원에서 오자마자 피아노 앞에 앉아 고사리 같은 손놀림으로 다채로운 선율을 꽃피웠다. 구식 단층 양옥 비좁은 거실에서 엘리제를 위하여가 애절하게 흐르거나, ‘아들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부드럽게 춤추거나, ‘뻐꾹 왈츠가 경쾌하게 재잘대기도 했다. 뻐꾹뻐꾹, 음률이 지저귈 때면 나도 뻐꾸기가 되어 고향 뒷산의 포근한 둥지로 날아들었다. 그때가 우리 집 실내에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가 넘쳐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딸아이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체르니 30을 치고 바흐를 마지막으로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종합 학원에 등록했다. 막내인 아들도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으나 흥미와 재능이 없어선지 꾸준히 배우지 않고 일찌감치 포기해버렸다. 피아노 소리가 점점 뜸해지면서 거실의 밝은 기운도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그 집을 팔고 새로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새 아파트 거실에 피아노를 들여놓았으나, 여고생이 된 딸과 중학생을 바라보는 아들은 피아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덩치 큰 피아노가 자리만 차지하는 흉물이 되어 버렸다. 남편은 피아노를 눈여겨볼 때마다 팔아버리자는 말을 꺼내곤 했다. 나는 매번 단번에 거절했다. 나로서는 벼르고 별러서 산 피아노가 아니던가. 내 몸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 담긴 그 피아노는 집 안에 있는 물건 가운데 보물 1호이자 두 아이에게 준 선물 1호였다. 아내의 동의 따윈 필요치 않다고 여긴 듯 남편은 어느 날 중고 피아노 매매상을 불러들였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마당이었다. 내가 나서서 만류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실에서 사라지는 피아노를 말없이 배웅했다.

피아노를 판값으로 새 컴퓨터를 사들였다. 이번엔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컴퓨터에 한창 재미를 붙인 아들이 기능이 느린 구형 컴퓨터를 신형으로 바꿔달라고 졸라대던 중이었다. 하지만 구입할 때의 반에도 못 미치는 피아노 값은 컴퓨터를 사는 데도 턱없이 부족했다. 이제,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는 컴퓨터가 원래 제자리인양 버티고 앉아 있다. 피아노 수십 대의 건반이 출렁여야 할 자리에 컴퓨터 수십 개의 자판이 활개를 치고 있다.

피아노가 없어진 지 십몇 년이 지났지만 불편을 느끼기는 고사하고 거의 잊다시피 살았다. 지금은 정보의 바다인 저 검은 물체가 없다면 나부터 불편하여 안절부절못할 것이다. 아무리 소중했던 것도 잊히기 마련인가. 그것이 오히려 슬픔의 악곡이 되어 가슴을 두드린다.

피아노는 엄마인 내가 두 자녀에게 기대한 꿈의 한 자락이었다. 오늘따라 내 눈길은 자꾸만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가 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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