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 이태영 작품 4-5-2020
의식의 흐름을 따라 / 김영교
사람의 등이 침묵에 잠겨 절벽으로 서 있을 때는 슬프다. 멈춘 손등이 그렇고 돌아서는 뒤꿈치 발 등 또한 그렇다. 끝이라는 개념, 석양에 비낀 누군가의 등이 내일의 꿈이랄까 향기를 막아버린 때도 그렇다. 눈물을 끌어 올리는 펌프가 될 때가 있었다. 난감해지기도 했던 그때 기억 하나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 해 늦 여름 수양회 산장에서 였다. 그 날 빈 운동장 같은 방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강약의 고운 선룰로 가득 채우던 한 여인의 등을 목격하고 오래 -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멋있다', '누구지' 하고 다가갔다. 어느 듯 우아한 분위기를 훌훌 거두어 그 여인은 건반을 덮고 조용히 일어서서 걸어 나갔다. 팀 멤버같았다. 산장 분위기에 걸맞는 그 여인의 보일 듯 말 듯 미소는 나에게 눈인사를 건냈다. 여백 있는 더블 메팅한 인상파 그림 한 장이었다. 넋을 잃은 듯 나의 시선은 발등을 끌고 가는 그녀의 신발 뒤꿈치에 멎었다. 한참 내려다 보며 머물러 있던 그리고 비망이 되고 말았다.
가늘게 숨 쉬고 있던 나의 인식 기능이 쨍그렁 소리를 내며 수천 조각으로 깨어졌다. 밥상에 오르는 의식의 보시기들이 깨진 채 굴절, 빛이 산만하게 부셨다. 무대같은 등을 있는 대로 다 보았다. 피아노를 치던 그 여인의 등은 절벽 너머 파도였다. 아침햇살 넘실대는 대해였다. 아침 출항 준비를 다 끝낸 듯 나의 목격은 감동이었다.
대해의 푸른 꿈이 넘실대는듯 싶었다. 손녀 아멜리를 위시해 사랑하는 가족들을 연거퍼 먼저 보낸 나의 슬픔이 자즈라 들고 있을 즈음이 었다. 금빛 찬란한 물이랑은 점점 퍼져나갔다. 수천 갈래로 뻗어 나가면서 지구 질서 한 가운데 나를 올려놓고 치솟게 했다. 빠져 허우적 대던 나의 내면세계였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 한 발 뒤에 서있을 수 있는 안정감이 그때 피어나기 시작했다. 조화와 소망의 산들 바람이 물기를 물고 불어왔다. 등은 분리될 수 없는 슬픔과 아름다움의 척추를 딛고 일어서려는 우주의 중심이었다. 눈물이 적셔놓은 낡은 옷을 벗고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 여인의 피아노 등은 저 아래 페달 발을드러낸 획기적 사건이었다. 생명 퍼덕이는 바다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예술이고 비상이었다. 밤이 내리면 그녀의 등은 내 안을 불 밝힐 것이다. 그 때 항구의 빈 배는 출항의 꿈으로 설레일 것이다. 그리움도, 눈물도 모두가 지휘봉 아래서는 극치의 아름다움만 연주할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더욱 그리워지게 된다. 내 의식 안에 공존이 가능한 세계, 지극히 아름다워서 눈물이, 그 눈물이 불러오는 지고의 선함, 그 해 9월 30일, 그 날 이후 지금까지 기억 속 그 피아노 방을 수없이 오가며 물 밖으로 호흡이 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그 등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의식의 흐름이 푸르다.
4/17/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