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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 동연이 분갈이 2-20-2021

 

5년 전 오늘(2016-2-11)

글방의 글 #1,#2  再錄

                   #1  "애비는 이었다"에 담긴

             보들레르적 위악(僞惡)과 그 갈등

신우재                                    - 미당의 《자화상》다시 읽기

당의 시 “자화상”에 대한 김명희 시인의 글을 읽고

저도 다시 한 번 그 시를 찬찬히 읽어 보았습니다.

미당은 이 시 본문에서 “스물세 해 동안...”이라는 문구를 넣었고,

시의 말미에 이 시를 1941년 가을에 썼고, 작자의 時年이 23세라고 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이 시점과 시년을 강조하는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당은 이 해 3년 전 결혼한 부인 방옥숙 여사<사진>와 첫 아들을 데리고 상경하여 서울생활을 시작합니다.

동대문 여학교 교원으로도 취직이 되어 생활도 비교적 안정이 되었습니다.

시인으로 등단하여 어엿하게 첫 시집을 내는 행운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생의 전환기에서                    

그 동안 온갖 일탈과 방황과 기행으로 점철된  미당의 말년, 처 방옥숙과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고백하는 입장에서

이 시를 썼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 삶을 들여다보면 이 시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행히 미당은 다른 어떤 시인 보다 그의 성장기의 삶을 솔직하고 상세하게 공개했습니다.

1983년 발간한 10번째 시집 『안 잊히는 일들』(현대문학사)과

1988년에 낸 『팔할이 바람』(혜원출판사)은 시로 쓴 미당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뒤 1994년에 상·하 두 권으로 된 『미당 자서전』(민음사)은 일종의 성장소설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유려한 문제와 섬세한 심리묘사가 압권입니다.

“자화상”의 전반부에서 미당은 가족사를 약술합니다.

“애비는 종이었다.”는 유명한 첫 구절은 중학생이 읽으면

“어, 서정주의 아버지는 종이었구나!” 쯤으로 받아들이겠지요. 그러나 미당의 이 구절은

미당이 한 때 심취했던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風의 僞惡的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당의 부친 俆光漢은 시인 아들 덕분에 졸지에 종이었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지만,

15세에 무주 장수 지역 백일장에서 장원을 할 정도로 똑똑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인촌 김성수의 부친 金祺中의 논 다섯 마지기를 얻어 농사를 지으면서

다른 소작인을 관리하는 農監(마름)일도 맡아 보고 있었습니다.

김기중은 미당의 자서전에서 ‘동복영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同福은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입니다. 김기중은 용담, 평택들 여러 고을에서 군수를 지냈는데

마지막 부임지가 바로 이 동복이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동복영감’이라고

불렀던 듯싶습니다.

『미당 자서전』 1권 166-180쪽에는 미당이 줄포초등학교 1학년 되던 해

가을에 서울에서 동복영감이 후처(公州 金씨 김영희)와 후처에게서 난 아들

(김성수의 이복동생) 김재수 부부를 데리고 성묘와 ‘소작료 매는 당부’를 위해

줄포에 내려온 일을 아주 상세하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어린 미당에게 이 사건은 매우 신기하고도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어린 미당은 잠자리에서 부모가 상전들의 눈에 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나누는 대화를

죄다 엿들었습니다. 총명한 미당은 부모의 한숨과 탄식의 뜻을 어렴풋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손톱이 까만 엄마와 자동차부에 마중을 안 나왔다고 엄마를 닦달하던 마님의

밝은 분홍색 손톱의 차이를 알게 된 것이겠지요.

미당의 아버지는 학식이 있는 분이고 대지주의 農監이니 결코 ‘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2천석꾼 동복영감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지는 사내, 서생 노릇, 마름 노릇 하느라고

늘 밤늦도록 집에도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는 정신적인 ‘종’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김명희 시인은 “서정주 《자화상》의 첫 절과 두 번째 절의 기상(氣象)이 너무나 달라서

두 번째 절은 나중에 쓰인 것이 아닌가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저 첫 연은 출생과 유년 시대를 이야기하였고,

둘째 연에서는 철들어서 스물세 살에 이르는 질풍노도시대를 회고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한 번에 쓴 것이라는 거지요.

미당이 자전시편들과 자서전을 자세히 읽어 보면 그가 말하는 ‘바람’, ‘부끄러움’, ‘죄인’,

‘천치’, ‘병든 수캐’ 등의 숨은 뜻을 풀어낼 수 있는 단서를 많이 찾아낼 수 있습니다.

어느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쩔쩔 끓는 피를 어쩌지 못하는’미당은 매우 요란한

사춘기를 보냅니다. 미당은 머리가 총명하여 또래보다 어렸지만 공부를 잘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급생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에 벌써 갈보 집을 드나들 정도로

나이가 익은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미당도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 머슴으로부터 수음하는 버릇을 배워서

그 짓에 탐닉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리비도의 용암이 분출하는 사춘기에

전라도 시골 촌놈으로 말쑥하고 부유한 서울 아이들 사이에서 살아야 했던 미당은

많은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손톱으로 구분되는 두 종류의 계층이 있습니다.

늘 손톱에 까만 때가 끼어 있는 ‘에미’와 같은 사람들과 서생인 아버지처럼 말끔히 다듬어지고

분홍빛을 띤 손톱입니다. 미당의 초등학교시절 일본인 여선생, 전문 학생시절 짝사랑하던 신여성,

동네 부자 집의 인물 좋은 첩실, 기차간에서 만난 해말간 도회지 여학생 등은 모두

깨끗한 분홍손톱을 가진 여성들입니다.

이 두 손톱이 상징하는 계층 사이에서 미당은 많은 심리적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내면에서 끓어오르던 미당의 사춘기는 요란합니다.

중앙학교에 다닐 때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맞고, 고창고보로 옮겼으나

그곳에서도 또 뛰쳐나옵니다. 번번이 아버지의 돈을 훔쳐 가출하고,

톨스토이 주의자가 되어 빈민운동에 가담하여 넝마주이 노릇을 하기도 하고 사회주의 서적을 읽으면서

좌익의 꿈도 꾸어보기도 합니다. 중이 되려고 한 적도 있고, 만주를 헤맨 적도 있습니다.

금강산, 해인사, 제주도로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스물세 살이 되던 해의 미당은 이런 사춘기 병을 극복한 성숙한 시인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두엄 속에서 자란 참외가 더 달듯이 그의 바람은 미당을 더욱 찬란한 시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시인으로 미당은 하얀 손톱을 지향하는 모더니스트/모던 보이, 도회지 쪽으로 가지 않고

청국장처럼 향토색이 짙은 고향 전라도, 손톱이 까만 사람들 쪽으로 갔습니다.

그것이 미당을 불멸의 큰 시인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사모'(마르코글방을사랑하는사람들의모임)회장/전 청와대 공보수석,

     MBC기획부장, 문광부 공보국장 역임/경복고~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졸>

 

-참고문헌 / 김영교 2-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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