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쌤윤 장로의 그 길 너머에 / 김영교

 

말로만 듣고 신문에서나 보던 의료 사고였다. 의사인 옆집 쌤윤장로의 이야기다. 그것도 새해 벽두에 어느 누구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이 동네 지역 신문에도 크게 소개된 최신식 첨단장비와 테크놀러지로 새롭게 증축하여 지난 해 오픈 한 TM 병원에서 발생했으니 말이다. 아주 간단하다고 들 하는 급성맹장 수술 때문에 생긴 이 사고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의사 가운을 입고 진료하던 양지 의사가 환자복을 입고 병상에 누워 수술받는 음지환자가 되었으니 정말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일 같았다. 누구나 고통을 통해 영적으로 자라기도 하는 필요 통과과정이라 자위하게 이르렀다. 수술대 위의 환자는 의식이 없어 부인 윤권사와 가족친지들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기다림이었다.

 

작년 말 옆집 쌤윤장로는 34년간의 병원개업을 마무리 했다. 40년 전 군의관 최전방 군 복무 시절 하나님께 서원했던 약속 하나를 지키기 위해 내린 결단이었다. 가족처럼 지내는 나의 후배가 되는 부인 윤권사도 적극 찬성하였다.

 

기회가 닿을 적마다 여러 해 동안 오지 여러 나라에 단기 의료 선교사역에 참여 헌신해왔다. 많은 경험을 쌓아 온 쌤윤 장로는 였다. 쓰임을 받기에 타고난 건강이 고마웠고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잠도 어디서나 잘 잤으며 해발 4천미터의 산소부족 고산에서도 잘 버텨 주었던 건강은 축복이었다. 오지 선교지에 적합한 체질로 다져갔다. 이번에는 두 내외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명성병원으로 장기 의료선교사로 마음을 굳히고 꿈과 계획을 실현시키고 있던 참이었다. 수속도중이었고 몸과 마음이 분주 하던 바로 그 무렵에 일이 터진 것이었다. 정초에 서울을 방문, 필요한 에티오피아 비자 수속을 위한 구비서류를 준비, 3월에 출발 예정이었다. 마침 수속 절차상 시간을 끌고 있을 즈음이었다. 두 내외가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대사관을 다녀온 오후 갑자기 배꼽주위가 아파오며 점점 통증이 심해져 갔다. 의사직감 판단으로 쎔윤장로는 급성맹장염임을 알았다. 주치 의사에게 연락 한 후 급히 응급실로 향했다. 맹장염은 어려운 수술이 아니니 염려 하지 말자고 가족들 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평상심을 유지했다. 그날 밤 12경 진통제 주사를 맞고 다음 날 아침 7시경에 수술실로 옮겨졌다. 50대로 보이는 여자 외과의사가 다가와서 본인 소개를 했다. 이 수술은 복강경으로 실시하는 아주 간단한 수술이며 하룻밤 자고 다음 날 퇴원할 수 있을 거라고 우리를 안심시켜주었다.

 

이상하게도 환자 혈압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으며 얼굴은 창백해져 갔다. 수술 후 3-4시간 지나면서부터 수술 한 부위에 통증과 압박이 점점 심해져갔다. 피검사 헤모글로빈 수치가 11, 수술 전 헤모글로빈이 16, 심상치 않아 시카코 아들 내과의사가 날아왔다. 그 때서야 놀란 듯 곧 재수술을 위해 급히 수술실로 다시 옮겨갔다. 전신마취 후 중환자실에서 의식에서 무의식의 호흡을 들락거리며 그 후 쭉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27년째 이웃사촌이었다. 두손 모아 정성껏 기도에 뜻을 같이 했다.

 

수술할 때 외과의사의 실수로 동맥을 건드렸다는 사실, 그 동맥을 찾기 위해 재수술을 하고 복강경으로 한 맹장염 수술 때 절단된 동맥을 찾기 위해 또 한 번의 복강경 수술을 해야 했지만 이 수술로도 새는 핏줄을 찾지 못했다. 결국 세 번째 수술로 배를 30 cm정도 자르는 개복 수술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 수술로도 찾지를 못했으니.... 그 때는 이미 너무 출혈이 심해 피 나오는 부위가 가려져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 동안 많은 수혈을 해야 했고 새벽 2시경에 외과 방사선 전문의(Interventional Radiologist)가 오른 쪽 사타구니 동맥에 카데터와 염색액 (catheter와 dye)을 넣는 수술을 통해 기적적으로 출혈 동맥을 드디어 찾아내 지혈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 의사가 30분만 지체 했어도 쌤윤장로님 생명은 보장될 수 없었을 정도로 경각에 놓인 심각 상태였었다. 초저녁부터 새벽 4시까지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다섯 명의 의사들이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그 후 3일간 중환자실과 7일간 병실에서 통증과 싸우며 사투를 벌렸다. 산소 보조기 구강투입으로 입은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겼었다. 혼수상태에서 육신은 고통 중에 있었지만 커다란 두 손에 쌤윤장로님 영혼은 보듬어 안기어 있었다. 아름답고 밝은 비젼(vision)이었다.

 

윤장로는 경험했다. 입원해 있을 때는 옆 병실에서 들리는 환자의 가래 끓어 숨넘어가는 듯한 기침소리와 고통 때문에 마냥 울어대는 아이의 울음소리, 입원실 뭇 기계 돌아가는 소음, 쑤시는 고통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경험을, 푹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가족이 있는 게 무척 고맙다고 후속담을 들려주었다. 쌤윤장로는 고백했다. 하나님의 간섭은 쌤윤장로를 의료선교사로 파송하기 위해 필요한 확실한 검증 인증샷을 이렇게 실행했다. 적절한 타이밍! 확실히 선교지로 떠나기 전 검열이 필요했었나 보다. 만약 열악한 아프리카, 언어도 안 통하는 어느 낯선 부락에서 일어났다면 어찌 됐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다행이 출발 전 준비하는 그 시기에 그것도 LA에서 일어났으니 쌤윤장로의 눈치코치 있는 맹장이 귀엽고 고마웠다.. 이 감사한 마음이 이 모든 불편과 고통을 유발케 한 의료사고의 원망을 물리치고 있다. 에티오피아 의료 선교 자원 봉사도 하나님 때(in His time)에 갈 수 있도록 육체적 가시를 제거시키며 기도로 더 준비케 한 주님의 뜻을, 내 뜻과 일치하지 않을 때라도, 쌤윤장로를 통해 묵상하게 되었다. 

 

나의 죄 사함을 위해 아낌없이 흘리신 예수 십자가 보혈의 의미가 나를 크게 눈뜨게 했다. 구원 계획과 선교의 물줄기는 지금 이순간도 흘러 카이로스 위에 임하고 있다. 새롭게 스스로 깊이 깨닫도록 체험케 한 그 의도를 쌤윤장로를 통해 알게 된 것, 축복이었다. 은혜였다. 

 

무엇보다도 귀한 생명을 다시 연장시켜주신 의미, 주님의 그 계획과 섭리, 그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흔들리는 삶의 현장에서 중환자 체험을 통해 시련과 시험, 모두가 믿음의 정금을 위해 필요한 과정임을, 정말 하나님의 은혜임을, 덤의 새로운 생명의 기쁨, 이 모두가 우리 모두의 고백이며 또한 쌤윤장로의 간증이 될 것이다, 지상에서 남은 나의 생애 동안 쌤윤장로 같은 믿음의 이웃사촌 관계를 허락 해 주심을 감사하노라, 사랑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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