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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말리는 딸의 용기                                                                                               

 

   우리나라 속담에 ‘원님 덕에 나팔 분다.’란 말이 있다. 나는 딸 덕에 나팔 분 엄마였다. 딸 덕에 무료 비행기를 수없이 타고 다녔다. 한 번은 고국 방문의 기쁨을 안고 한국행 무료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무료 비행기는 일반석으로 좌석 배당을 받는다. 그러나 이날은 일등석 좌석 가운데 빈자리가 생겼다며 승무원이 일등석으로 안내해 주었다. 무료 탑승이라 그러지 않아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데 일등석에 앉게 해주어 고마우면서도 어쩐지 송구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일등석이라 넓어서 편안하고 아늑했다. 음식도 고급스럽고 맛이 좋았다. 여하튼 딸 덕에 기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서민이 일등석을 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딸 덕에 일등석을  탄다고 생각하니 촌닭 관청에 잡아 다 놓은 것처럼 나는 어쩐지 분위기에 어색했다.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멋쩍었다. 누가 뭐래도 좌석이 편해서 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갑자기 기체가 많이 흔들려서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많이 흔들리는지 나로서는 처음 겪는 공포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하면서 하나님께 SOS 신호를보냈다. 이상 기류로 바람이 많이 불어 기체가 흔들리니 조금 있으면 정상 비행이 된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은 공포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긴장하고 있었다. 기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데 나의 기도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몇 분 동안의 요동이었지만 나에겐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딸 생각이 간절했다. 딸은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비행기를 타고 있을까, 아니면 쉬는 날일까 하고 궁금증이 더해만 갔다.      

   딸은 비행기 날개에 꿈을 싣고 세계를 누비며 비행기 타는 항공사 승무원이었다. 독수리가 큰 날개를 펴고 하늘 높이 훨훨 날아다니듯 딸은 청춘의 꿈을 하늘에다 미련 없이 불태우고 있는 낭만의 아가씨였다. 딸은 비행기 타는 것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항공사 승무원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도전정신이 강해 무슨 일이든 해 볼 만한 일이면 겁 없이 덤비는 못 말리는 딸이었다. 용감무쌍한 귀여운 당찬 아가씨였다.       

   어느 부모치고 자식 귀하지 않은 부모가 없겠으나 나에게 눈동자같이 귀한 딸이 비행기를 타고 다니니 마음이 늘 놓이질 않았다. 어디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라도 나면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기예보에 항상 귀 기울이며 혹시 태풍이라도 부는 날이면 걱정이 되어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더구나 멀리 국외로 가는 비행기를 탈 때는 집에 돌아올 때까지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항상 하나님께 딸의 무사 비행을 기도했다.        

   딸은 대학에서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하고 큰 종합병원에 회계사로 취직하여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이 지루하다며 사표를 내고 노스웨스트 항공사에 취직하여 승무원으로 국내선 국외선 비행기를 탔다.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베이스 캠프에서 4개월 훈련과정을 모두 끝내고 마지막 필기시험에 합격하여 감격하며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 졸업 사진을 내게 보내와서 나도 함께 축하하며 기뻐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에 있는 쌍둥이 무역센터가 테로 범에 납치당한 비행기의 자폭으로 차례로 무너지는 광경을 나는  TV뉴스를 통해 목격하였다. 세계가 망연자실했던 엄청난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큰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었다. 혹시 내 딸이 저 비행기를 타고 있었으면 어떻거나 걱정하면서 딸의 안부가 몹시 궁금하였다. 딸에게 전화를 걸어도 불통이었고 연락이 안 되어 안절부절못하였다. 나는 계속 뉴스에 귀 기울이며 두 쌍둥이 건물을 들이받은 비행기 회사의 이름이 궁금했다. 나는 그 비행기 소속 회사의 이름을 밝힐 때까지 나는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나는 계속 기도하면서 딸에게 무슨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그동안 딸에게 잘해 주지 못했던 아픈 과거가 생각나면서 딸에게 미안한 생각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    

   처음 이민 와서 부모가 이국땅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니까 공부만 하던 딸은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자기도 시간제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엄마 아빠를 돕겠다고 발 벗고 나섰다. 친구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고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할 시간에 학교 공부를 끝낸 방과 후 몇 시간씩 매일 일을 하겠다며 꽃가게에 취직하였다. 바닷가 부잣집 동네에 꽃 배달 일을 맡아 하루에 몇 시간씩 꽃을 배달하고 집에 돌아왔다.       

   하루는 딸이 일하는 바닷가 부촌에 자리 잡은 꽃가게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꽃배달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였고 주인 여자에게도 인사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그 당시 딸은 18세였다. 주인 여자는 딸을 매우 칭찬하면서 체구는 조그마해도 어찌나 운전을 잘하고 꽃배달을 빨리 끝내는지 고객들이 나의 딸만 찾는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나는 꽃배달을 한다고 해서 조그마한 6인승 승합차를 타고 다니는 줄 알았다. 한 두어 시간 후 딸이 꽃 배달을 다 끝내고 차를 몰고 들어오는 것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조그마한 차가 아니라 깡통 큰 벤 차였다. 딸은 나보다 키가 작고 가냘픈 몸매를 한 조그마한 예쁜 체구였다. 나는 그 큰 밴 차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 저리 큰 차를 조그마한 처녀가 운전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미국에 30여 년을 살고 있지만, 아직 그 큰 밴 차를 운전할 줄 모른다. 무서워서 운전대에 앉을 수가 없다.       

   나는 그 자리에서 딸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나는 네가 이렇게 고생하는 줄 몰랐구나. 이 어미를 용서해다오. 이제 이 일을 그만두어라. 교통사고로 다친 엄마 허리가 다 나아 직장에 곧 나가게 될 것이니 그동안 고생이 참 많았구나, 내 딸아. 나는 집에 운전하고 오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딸은 계속 일을 하겠다고 우겼지만 내가 그만두게 하고 공부에만 전염하도록 해서 좋은 대학을 들어가게 되어 그나마 마음의 위로를 얻었다. 딸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계속 시간제 일을 해서 학비를 충당하고 학교에서 장학금을 타면 생활비에 보태라며 나에게 주곤 했었다. 얼마나 착한 딸이었는데……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메어왔다. 

   나는 TV 뉴스를 지켜보며 딸의 행방을 알 수 없어서 애간장이 녹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삼 천여 명이 건물 잔해에 묻혀 죽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구조 작업하던 소방관들도 거의 다 죽고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위싱톤에 있는 미국 국방성 펜타곤 건물이 납치된 다른 비행기의 자폭으로 불타고 있다고 보도가 들어와서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혹시 펜타곤을 들이받은 비행기를 딸이 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전율의 소름이 짝 끼쳤다. 초조한 마음으로 비행기 소속회사의 이름을 밝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비행기 소속 회사를 밝혔는데 딸이 근무하는 비행기 회사가 아니어서 나는 그때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이 일이 있고난 뒤 딸에게 항공사 승무원 직업을 그만두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딸은 곰곰이 생각한 후에 단호한 결심을 하고 비행기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딸은 그 후 곧 결혼하게 되었고 지금은 북가주 새크라멘토에서 사위와 함께 잘 살아가고 있다.       

   몇 년 전에 뉴욕시 허드슨 강 위에 비행기가 비상 착륙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또 한 번 놀란 일이 있었다. 갈매기가 프로펠러에 빨려 들어가 엔진이 정지되는 사고였었다. 비행기 기장의 놀라운 기지로 비상 착륙에 성공하여 많은 사람의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다.      

   그때에도 아찔한 마음에 딸을 생각하니 직장을 그만둔 것이 천만다행 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딸이 비행기를 타지 않으니 나는 이젠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을 때 큰 밴을 운전하면서 꽃배달을 하는 모습이 떠오를 때면 참 대견스럽고 기특하다고 생각이 든다. 나는 한국에 비행기 타고 갈 때도 마음을 졸이는 데 세계 어느 곳이던 무서워하지 않고 비행기 타는 용기가 그때부터 생기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 담대함은 전혀 엄마를 닮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겁쟁이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오직하면 놀란 토끼란 별명을 들었을까.      

   독수리가 날개를 접고 암탉이 되어 두 병아리 새끼를 날개 밑에 품고 키우는 모습이 아름답다. 어미의 사랑을 마음껏 베풀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나 역시 행복 지수가 상대적으로 상승하고 있다./늘 추억의 저편

 

*(제 7회 경희해외동포문학상 수필부문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