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반딧불 축제에 다녀와서
형설 지공(螢雪之功) 金秀映
올해 6월 중순 전라북도 무주에서 열리는 반딧불 축전에 참관하고 반딧불이의 생태와 인간과 자연에 미치는 영향 등을 관찰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다. 반딧불이는 자연환경을 살리는 이로운 곤충이란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 때가 되면 나는 시골로 내려갔다. 소꿉친구들과 메뚜기, 매미, 잠자리를 잡으러 들로 산으로 천방지축 좋아라 쫒아 다녔던 그 옛날 그 시절이 몹시 그립다.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기도 쫓아내고 그 불 속에 감자와 고구마 구워 먹던 일. 냇가에 반딧불이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것이 신기해서 반딧불이를 붙잡으려 쫓아다녔지만 허탕을 쳐서 맥이 빠졌던 일이 생각났다.
반딧불이가 배꼬리 부분에서 어떻게 불빛을 낼 수 있는가가 나에게 큰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는데 이 축 전에 참가함으로 모든 의문점이 풀리게 되었다. 지구 상에는 약 2천여 종의 반딧불이가 남극과 북극을 제외한 전 세계에 분포하여 서식하고 있으며, 인간에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는 정서 곤충이자 환경을 측정하는 척도로서의 환경지표 곤충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여섯 종류의 반딧불이가 서식하고 있으며 명칭은 “반디”, “반딧불”, “개똥벌레”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정확한 명칭은 “반딧불이”이다. “반딧불”은 반딧불이가 내는 불빛을 의미한다. 반딧불이가 빛을 내는 중요한 목적은 짝짓기, 하지만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위험을 알리는 통신 수단으로 빛을 내기도 한단다.
반딧불이의 빛은 반딧불이 배 부위에 있는 발광 세포에 의해 발생한다. 루시페린이라는 화학물질이 생체에너지인 APT와 루시페라아제라는 효소에 의해 분해되는 과정에서 옥 시 루시페린과 작용해 빛을 발산하게 된다고 한다.. 반딧불이의 몸은 2cm를 넘지 않은데 알에서 애벌레, 애벌레에서 번데기, 번데기에서 성충이 되기까지 약 1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애벌레는 다슬기와 우렁이 등을 먹고 자라지만 성충이 되어서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불을 밝히고 구애만 하다가 1-2주일 만에 죽는 것으로 알려졌다.
요즈음 우리나라에는 반딧불이가 사라져가고 있다. 먹이인 달팽이가 채소를 파 먹는 해충으로 알려져 달팽이를 화학약품을 뿌려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반딧불이와 함께 달팽이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전깃불이 없고 초나 호롱불을 켜 놓고 살 때는 반딧불은 참 귀한 곤충이었다. 캄캄한 밤에 외등이 없을 때 반딧불이라도 반짝이면 캄캄한 바다에 등댓불처럼 길을 밝히는 것처럼 반갑고 기뻤다. 어둠을 밝힐 정도로 밝지는 않지만, 밤에 빛을 본다는 자체가 위안을 주고 어둠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게 되어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는 정서 곤충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불빛이 빨간 색깔이 아니라 연초록색으로 반짝이기 때문에 시원한 색깔로 시력에도 자극을 주지 않는다. 부드러워 눈을 보호하고 보기에도 미적으로 아주 아름다운 색깔이라 반딧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특히 글을 쓰는 문인들은 반딧불 하면 낭만의 대상이 되어 시상이 떠오르고 글을 쓸 수 있는 마음 문을 열게 해 준다.
과거의 우리나라 선비들은 전기가 없어 반딧불 밑에서 혹은 하얀 눈이 발산하는 빛에서 밤에 공부했다는 고사가 있다. 과거에 급제해 암행어사가 되든지 큰 벼슬을 하게 되면 형설지공으로 성공했다고 종종 말을 한다. 오늘날에도 어려운 환경을 딛고 특히 학문에 성공한 사람들을 일컬어 형설지공을 쌓아 성공했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나는 이 말의 유래를 찾아보았다. 중국 진나라 효 무제 때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여 훌륭한 인물이 된 차 윤이란 사람이 있었다. 차 윤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학문에 뜻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집이 너무 가난하여 낮에는 일하고 밤에만 공부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등불을 밝힐 기름이 없어서 자루를 들고 다니며 수천 마리의 반딧불이를 잡아 그 빛으로 글을 읽었다. 그 결과 이 부상서란 높은 벼슬에 올랐다.
손 강도 차 윤과 마찬가지로 집이 가난하여 등불을 켤 기름을 살 수가 없었다. 겨울이 되면 그는 창가에 앉아 밖에서 들어오는 눈빛에 비쳐 글을 읽었다. 그렇게 노력한 보람이 있어 그도 후에 어사대부가 되었다. 그 후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을 이루는 것을 비유한 말이 '형설지공이다.
나는 이번 반딧불 축전에 참관하고 어릴 때부터 풀리지 않던 궁금증이 다 풀려서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나는 형설지공을 생각하면서 올해 6월 28일 희수를 맞이하신 작은 오라버니가 생각났다. 희수를 맞이하신 오라버니를 축하해 드리기 위해 동생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후에 무주 반딧불 축전을 관람할 기회가 주어졌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6.25 전쟁을 겪으신 오라버니는 그 당시 참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다. 거의 모든 사람이 고생했지만, 아버님께서 전쟁의 와중에 돌아가시고 집안의 가장처럼 가족의 생계를 보살펴야 했다. 고학하시면서 열심히 공부하셔서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뉴욕 경영대학원과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셨다. 박사학위를 받으신 후 오늘의 경영학 학문의 금자탑을 쌓아 고려대학교 제 일호 석좌교수가 되어주신 오라버니께 박수갈채를 보낸다.
이번 희수를 맞이하셔서 6.25 전쟁 후 고등학교 천막 교실에서 시인으로 등단하신 후 시인의 길을 평생 접어 두셨다가 처음 시문집 '청천에 펄럭이는 旗처럼' 을 출간하시게 되어 본인 도 감개무량하시겠지만, 옆에서 지켜본 동생으로서 감회에 젖어 나는 눈시울을 붉혔다. 오라버니야말로 형설지공으로 오늘날의 고대의 석좌교수로 경영학계에 우뚝 서신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형설지공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게 새기게 되었다. 뜻밖에도 무주 반딧불 축전에 참관할 수 있는 축복이 주어져 더욱 오라버니의 학자로서의 공덕을 기릴 수 있어서 여간 기쁘지가 않았다.
나는 오라버니처럼 형설지공을 쌓지는 못해 부끄럽지만,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불빛이라도 되어 남은 삶을 아름답게 살고 싶은 작은 소망과 꿈이 있다. 화려한 꿈이 아니라도 작고 소박한 꿈이라도 꼭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면서 나는 인천공항에서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오라버니가 사시는 서울을 뒤로 한 체 반딧불 꿈을 안고 떠나는 나를 태운 비행기는 하늘 높이 독수리처럼 비상해 날아가고 있었다. (2010년 7월에 )/미주문협 문학서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