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야망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화창한 날씨가 있는가 하면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며 태풍이 불고 토네이도가 불어 가산과 인명피해를 가져올 때가 있다. 그 누구도 날씨를 내다 볼 수가 없다. 일기예보를 통해서만 날씨를 알 뿐 인간의 예감만으로는 알기가 어렵다. 우리 인생살이도 언제 어떻게 불행이나 불운이 닥칠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점쟁이가 생겨나고 사주팔자를 보는 관상쟁이가 많이 생긴 것 보면 인간은 한치의 앞을 내다 볼 수 없어서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해서 궁여지책으로 점쟁이를 찾게 되고 관상을 보게 되는 것 같다.
사람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어떤 불행이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아이티의 지진 재난처럼 자연재해로 말미암은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칠 수도 있고 미국의 9.11 사태처럼 테러의 공격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고 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한다. 특별히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말할 나위도 없이 엄청난 피해가 국민과 국가에 재난으로 다가온다. 일찍 인도의 시성 타 골이 읊었던 '동방의 등불'인 고요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에도 청천벽력과도 같은 6.25 전쟁이 발발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오고 삼천리 금수강산은 하루 아침에 초토화되고 말았다. 내 고향 안동에도 공산군이 침입하여 우리 가족은 피난길에 올랐고 경주까지 남하하여 피난생활하다가 겨우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참혹한 전쟁의 앙상한 잔상만이 남아 있었다. 그 누가 꿈엔들 상상이라도 했던 일인가. 국가나 개인이든 이러한 불행이 닥쳤을 때 현명하고 지혜롭게 어떻게 잘 대처해 나가며 어려운 고난의 시기를 잘 극복하고 견디어 내어 좌절에서 승리로 이끌어 가는 삶을 살 것인가 우리는 한 번쯤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본이 된 많은 사람의 자서전이나 그들의 삶을 통하여 많은 교훈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지나간 삶을 돌이켜 보면 오늘날의 나를 있게 만든 허다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 금할 길 없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통하여 많은 감화를 받아 내 인격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자라면서 두 오라버니를 통하여 내가 변화되기 시작했으며 대학교 다닐 때는 스승님이신 피천득 교수님을 통하여 많은 영향을 받아 삶이 변화해 가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특히 내 신앙의 본보기가 되어주신 우리나라 독립유공자 제34번 째인 스코필드 박사님을 만난 인연은 나에게 참 소중하고 귀한 일이라 그분을 잊을 수가 없다. 나에게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오늘날 내가 목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서도 내가 병으로 좌절했을 때 내 곁에서 묵묵히 직분에 충실하면서 나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새 희망을 찾게해 준 Dr. 최(최돈원 박사)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은 문둥병을 천형이라 하였지만, 발가락 하나 손가락 하나 떨어져 나가도 절망하지 않고 시를 읊었던 불굴의 시인이었다. 나는 그래도 한하운 시인보다는 낫지 않는가. 그는 불치병을 앓으면서 죽음에 초연한 시인이 아니었던가.
나는 하루아침에 내 꿈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허탈감 속에서 병원 침실에서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슬픔이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세상은 암담하게만 보일 뿐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파도가 넘실대는 푸른 송도 앞바다가 내 시야에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도 내 눈동자의 조리개는 그 영상을 담을 수가 없었다. 그 아름다운 꽃들의 향기는 봄바람을 타고 내 병실 안에 향수처럼 번져 와도 내 후각 기능은 마비되어 있었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새 소리에도 마음이 감동이 일지 않고 사막처럼 삭막한 메마른 심정이 되고 말았다.
기쁨이 사라진 삶 속에는 슬픔과 눈물만이 얼룩져 나를 비통하게 만들었고 나에겐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도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생에 대한 애착이 집요하게 나를 휘 여 잡았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열심히 투병생활을 한 결과 3년 만에 퇴원할 수가 있었다. 미국유학도 교편생활도 주치의의 만류로 포기하고 나는 보건사회부에 파견 나온 세계보건기구 (WHO) 결핵 고문관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세계보건기구에 보내는 모든 영문서류를 내가 맡아서 작성 영어로 번역해서 보사부 장관 이름으로 발송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보사부 방역과장이던 Dr. 최께서는 큰 오라버니 친구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보사부에 의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내 영어실력이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나를 아껴주고 동생처럼 사랑해 주었다. 나는 오라버니처럼 그를 따르고 존경했다. 그는 늘 슈바이처 박사가 위대한 인물이라며 그를 존경하고 그의 삶에 감동을 한다고 말했다. 친구 의사들은 졸업 후 대개 개업을 하거나 학교에 남았지만 Dr. 최는 박봉의 월급쟁이 공무원의 길을 택했다. 그는 전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너무 많이 닮아 나는 Dr. 케네디란 별명을 지어 주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 슬퍼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나라에 갑자기 콜레라가 창궐하여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확산일로에 있을 때 Dr. 최는 콜레라 발생지역인 마산에 내려가 최 일선에서 방역대책을 진두지휘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며칠 계속 지새우다 과로로 그만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각혈을 하다가 핏덩어리가 기도를 막아 숨이 막혀 그만 질식사하고 말았다. 평상시 아주 건강하게 보였던 그가 아무도 모르게 지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가 죽은 다음 모두가 알게 되었다. 자기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했던 그에게 더욱 주위 사람들은 감동을 하고 눈시울을 적셨다.
나는 Dr. 최의 죽음을 통하여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비관 자였었고 꿈을 잃은 자였었는데....., 나는 나의 옛 허물을 벗으면서 서서히 탈바꿈하고 있었다. 짧게 굵게 멋있게 살다가 간 아름답고 고귀한 삶의 사나이. 그 이름 Dr 최. 그는 나에게 귀중한 꿈을 심어주고 간 사나이. 대한민국의 공중보건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순직한 그의 이름 석 자 영원히 내 가슴에 별처럼 빛나리라. 그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국민의 건강을 위해 일하다가 순직했다. 나는 내 병을 비관만 하고 자학을 그동안 해 왔었다. 우리 두 사람은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각각 정반대의 명암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슬픔에서 나 자신을 추스르고 개구리가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기지개를 켜며 인생의 새봄을 맞이할 수가 있었다. Dr. 최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내가 입원하고 있었던 송도에 있는 적십자 결핵 요양소를 다시 찾아갔다. 봄철이라 만발한 철쭉꽃이 나를 반기는 듯 함박웃음으로 활짝 피어서 하늘을 향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나무들은 여전히 푸르르 청청 지조를 자랑하며 이곳저곳에 우람드리 잘 자라고 있었다. 송도 앞바다는 신선한 해초 냄새로 싱그럽게 나의 코를 간지럽게 하고 있었다. 일렁이는 파도 소리에 장 꼭 도의 소라 귀가 되어 해 조음을 유유히 들을 수가 있었다. 갈매기떼들은 줄지어 날아다니며 푸른 창공을 가슴에 품고 자유자재로 곡예를 하면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나는 뜨거운 감회로 눈물이 주르르 내 뺨 위로 흘러내렸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은 체 그곳에 한참을 머물러 서 있었다. 저녁노을이 빨갛게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면서 Dr. 최의 못다 핀 청춘의 꿈이 그곳에서 활짝 핀 꽃으로 눈부시게 떠올랐다.
* 한국산문(구 에세이풀러스)제 49회 수필공모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