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시인(1943년1월9일생_영남대 국문과교수)이 펴낸 열두 번째 시집 [정오의 순례]는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는 마흔 네 편의 연작시로 구성되어 있다. 사유와 철학에 빗댄 연작시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감각적인 시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요즘 시단의 흐름에 역행하는 인문주의자의 고집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시 몇편을 뽑아 특집으로 엮어보았다.
내일 이 땅에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화성엔 가지 않을 거야 거기엔 내 좋아하는 참깨와 녹두콩을 심지 못하므로 오늘 핀 도라지꽃 그릴 한 다스 색연필이 없으므로 일기책 태운 온기에 손 쬐며 쓴 시를 최초의 목소리로 읽어 줄 사람 없으므로 지구 아니면 어느 책상에 앉아 아름다운 글을 쓰겠니? 노래가 깨끗이 청소해 놓은 길 어느 방향으로 책상에 놓아 내일 아침의 왼쪽 가슴에 달아 줄 이름표를 만들겠니?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세상 한쪽이 더워진다고 쓴 말을 어디에 보관해야 정오까지 빛나겠니? 샘물이 솟는 곳에서 살고 싶다던 사람을 서서 기다리면 나무에 남은 온기가 절반은 식어도 모르는 사람의 손이 따뜻하리라
우리 삶이 먼 여정일지라도 걷고 걸어 마침내 하늘까지는 가야 한다 닳은 신발 끝에 노래를 달고 걷고 걸어 마침내 별까지는 가야 한다
우리가 깃들인 마을엔 잎새들 푸르고 꽃은 칭찬하지 않아도 향기로 핀다 숲과 나무에 깃든 삶들은 아무리 노래해도 목쉬지 않는다 사람의 이름이 가슴으로 들어와 마침내 꽃이 되는 걸 아는 데 나는 쉰 해를 보냈다
미움도 보듬으면 노래가 되는 걸 아는 데 나는 반생을 보냈다 나는 너무 오래 햇볕을 만졌다 이제 햇볕을 뒤로 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 별을 만져야 한다 나뭇잎이 짜 늘인 그늘이 넓어 마침내 그것이 천국이 되는 것을 나는 이제 배워야 한다
먼지의 세간들이 일어서는 골목을 지나 성사(聖事)가 치러지는 교회를 지나 빛이 쌓이는 사원을 지나 마침내 어둠을 밝히는 별까지는 나는 걸어서 걸어서 가야 한다
시(詩) 감상 : 우리는 모두 어디까지 걸어가고 싶은 걸까. 걷고 또 걸어서 발톱에서 피가 나도록 걸어서 도달하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성공을 내려놓고 명예를 내려놓고 어느 부분에서는 미움도 보듬어 노래가 되는 지점에서 굳이 칭찬하지 않아도 향기로 피는 꽃처럼 끝없이 걸어가야 한다. 이제는 햇볕을 뒤로 하고 그늘 속 천국을 지나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별까지 걸어서 가야 한다. 시인 문상금
나무들이 밤에도 움직이지 않고 제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나를 긴장시킨다. 어떤 명령도 나무들의 뿌리를 옮겨 놓지 못하는 나무들만의 저 푸른 질서. 땅 속에서 누리는 뿌리의 삶이 고요해서 잎새들의 공중의 삶은 소란하다. 땅의 피를 빨아올려 하늘로 옮겨주는 나무들, 침묵을 길어 음악을 만드는 악사들, 둥치를 감고 오르는 호박 새순이 어디로 뻗을 것인지를 나무들은 안다. 새들이 날아오고 마을 곳곳에 집 짓는 톱날 소리 치차(齒車) 소리처럼 들려와도 벌레들은 그 단단하고 따뜻한 집을 가지에 매단다. 나무들이여, 너의 나이테는 아직 열 살이기에 내일을 약속 받을 힘이 있다 욕망이 작아 가지에 매달려도 흔들림이 오히려 편안한 벌레들의 집은 나를 긴장시킨다.
그대가 노벨 문학상을 받던 해 나는 한국의 경상도의 시골의 고등학생이었다 안톤 슈낙을 좋아하던 갓 돋은 미나리 잎 같은 소년이었다 알베르 카뮈, 그대의 이름은 한 줄의 시였고 그치지 않는 소나타의 음역(音域)이었다 그대 이름을 부르면 푸른 보리밭이 동풍에 일렁였고 흘러가는 냇물이 아침 빛에 반짝였다 그것이 못 고치는 병이 되는 줄도 모르고 온 낮 온 밤을 그대의 행간에서 길 잃고 방황했다 의거가 일고 혁명이 와도 그대 이름은 혁명보다 위대했다 책이 즐거운 감옥이 되었고 그대의 방아쇠로 사람을 쏘고 싶었다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열광과 환희는,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아직도 나는 반도의 남쪽 도시에서 시를 쓰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백 사람도 안 읽는 시를 밤새워 쓰고 있지만 이 병 이 환부 세월 가도 아주 낫지는 않겠지만
새로 사온 등 푸른 고등어를 보면 나에게도 저렇게 등이 푸른 때가 있었을까 만 이랑 물결 속에서 대웅전 짓는 목수의 대팻밥처럼 벌떡벌떡 아가미를 일으키던 고등어 고등어가 가보지 않은 바다는 없었으리라 고등어가 가면 다른 고기들이 일제히 하모니카 소리를 내며 마중 나왔으리라 고등어가 뛸 때 바다가 펄떡펄떡 살아나서 뭍의 뺨을 철썩철썩 때렸으리라 푸른 물이랑이 때리지 않았으면 등이 저렇게 시퍼렇게 멍들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나에게는 흔한 일이지만 그래, 바다의 치맛자락이 만 겹이었다고 아직도 입을 벌리고 소리 치는 고등어 고등어가 아니면 누가 바다를 끌고 이 누추한 식탁까지 와서 동해의 넓이로 울컥울컥 푸른 바다를 쏟아놓을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일용할 양식 얻고 제게 알맞은 여자 얻어 집을 이루었다 하루 세 끼 숟가락질로 몸 건사하고 풀씨 같은 말품 팔아 볕드는 본가(本家)를 얻었다 세상의 저녁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아름다워 세상 가운데로 편지 쓰고 노을의 마음으로 노래 띄운다 누가 너더러 고관대작 못되었다고 탓하더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부르며 잠시 빌린 집 한 채로 주소를 얹었다 이 세상 처음인 듯 지나는 마을마다 채송화 같은 이름 부르고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어 본적에 실었다 우리 사는 뒤뜰에 달빛이 깔린다 나는 눈매 고운 너랑 한 생을 살고 싶었다 발이 쬐끄매 더 이쁜 너랑 소꿉살림 차려놓고 이 땅이 내 무덤이 될 때까지 너랑만 살고 싶었다
너를 이 세상의 것이게 한 사람이 여자다 너의 손가락이 다섯 개임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 너에게 숟가락질과 신발 신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여자다 생애 동안 일만 번은 흰 종이 위에 써야 할 이 세상 오직 하나 뿐인 네 이름을 모음으로 가르친 사람 태어나 최초의 언어로, 어머니라고 네 불렀던 사람이 여자다. 네 청년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패배한 뒤 술 취해 쓰러지며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기차를 타고 밤 속을 달리며 전화를 걸 사람도 여자다 그를 만나 비로소 너의 육체가 완성에 도달할 사람 그래서 종교와 윤리가 열 번 가르치고 열 번 반성케 한 성욕과 쾌락을 선물로 준 사람도 여자다 그러나 어느 인생에도 황혼은 있어 네 걸어온 발자국 헤며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 때 이미 윤기 잃은 네 가슴에 더운 손 얹어 줄 사람도 여자다 깨끗한 베옷을 마련할 사람 그 겸허하고 숭고한 이름인 여자
천천히 걷는 들길은 읽을 것이 많이 남은 시집이다 발에 밟히는 풀과 꽃들은 모두 시어다 오전의 햇살에 일찍 데워진 돌들 미리 따뜻해진 구름은 잊혀지지 않는 시행이다 잎을 흔드는 버드나무는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구절 뻐꾸기 울음은 무심코 떠오르는 명구다 벌들의 날개 소리는 시의 첫 행이다 씀바귀 잎을 적시는 물소리는 아름다운 끝 줄 넝쿨풀은 쪽을 넘기면서 읽는 행이 긴 구절 나비 날갯짓은 오래가는 여운이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혼자 남는 파밭 종달새 날아오르면 아까 읽은 구절이 되살아나는 보리밭은 표지가 푸른 시집이다 갓 봉지 맺는 제비꽃은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다
벅찬 약속도 아픈 이별도 해본 적 없는 논밭 물소리가 다 읽고 간 들판의 시집을 풀잎과 내가 다시 읽는다
저녁이 되면 먼 들이 가까워진다 놀이 만지다 두고 간 산과 나무들을 내가 대신 만지면 추억이 종잇장 찢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겹겹 기운 마음들을 어둠 속에 내려놓고 풀잎으로 얽은 초옥에 혼자 잠들면 발끝에 스미는 저녁의 체온이 따뜻하다 오랫동안 나는 보이는 것만 사랑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해야 하리라 내 등뒤로 사라진 어제, 나 몰래 피었다 진 들꽃 한 번도 이름 불러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 눈 속에 묻힌 씀바귀 겨울 들판에 남아 있는 철새들의 영혼 오래 만지다 둔 낫지 않은 병, 추억은 어제로의 망명이다 생을 벗어버린 벌레들이 고치 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가벼워서 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 집 그렇게 생각하니 내 생이 아려온다 짓밟혀서도 다시 움을 밀어 올리는 풀잎 침묵의 들판 끝에서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구르는 것이 일생인 삶도 있다 구르다가 마침내 가루가 되는 삶도 있다 가루가 되지 않고는 온몸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뜨겁게 살 수 있는 길이야 알몸밖에 더 있느냐 알몸으로 굴러가서 기어코 핏빛 사랑 한 번 할 수 있는 것이야 맨살밖에 더 있느냐 맨살로 굴러가도 아프지 않은 게 돌멩이밖에 더 있느냐 이 세상 모든 것, 기다리다 지친다 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지치지 않는 게 돌밖에 더 있느냐 빛나는 생이란 높은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치열한 삶은 가장 낮은 데 있다고 깨어져서야 비로소 삶을 완성하는 돌은 말한다 구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삶이, 작아질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삶이 뿌리 가까이 있다고 깨어지면서 더욱 뭉쳐지는 돌은 말한다
성공하려고 시를 쓴 건 아니다 물살같이 가슴에 아려오는 것 있어 시를 썼다 출세하려고 시를 쓴 건 아니다 슬픔이 가슴을 에일 때 그 슬픔 달래려고 시를 썼다 내 이제 시를 쓴 지 삼십 년 돌아보면 돌밭과 자갈밭에 뿌린 눈물 흔적 지워지지 않고 있지만 나는 눈물을 이슬처럼 맑게 헹구고 아픈 발을 보료처럼 쓰다듬으며 걸어왔다 발등에 찬 눈 흩날려도 잃어버린 것의 이름 불러 등을 토닥이며 걸어왔다 읽은 책이 모두 별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식이란 부스럼 투성이의 노인에 다가가는 것 앎은 오히려 저문 들판처럼 나를 어둠으로 몰고 갔으니
그러나 노래처럼 나를 불러주는 것 이기는 일보다 지는 일이 더 아름다움을 깨우쳐준 것은 시뿐이다 나무처럼 내 물음에 손 흔들어주는 것은 시뿐이다 고요의 힘인, 삶의 탕약인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人家)를 내려다 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남방(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 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 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 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오르고 생목(生木)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개미를 보면 나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비를 보면 나는 너무 많은 약에 길들였다라는 생각이 든다 잔디를 보면 냉이꽃을 보면 나는 너무 많은 봄을 놓쳐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생이 둥굴레풀 꽃다지 민들레 고사리 우엉잎 도꼬마리 이질풀 아, 나는 너무 많은 이름들을 놓쳐버렸다
구름을 보면 나는 아직도 내 앞에 걸어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강물을 보면 파도를 보면 나는 아직도 내 앞에 출렁거릴 것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도 지나고 보면 즐거운 친구라고 배춧국 김 오르는 양은그릇들이 날을 부딪치며 속삭인다 쌀과 채소가 내 안에 타올라 목숨이 되는 것을 나무의 무언(無言)으로는 전할 수 없어 시로 써보는 봄밤 어느 집 눈썹 여린 처녀가 삼십 촉 전등 아래 이별이 긴 소설을 읽는가보다 땅 위에는 내가 아는 이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서까래 아래 제 이름 가꾸듯 제 아이를 다독여 잠재운다 여기에 우리는 한 生을 살러 왔다 누가 푸른 밤이면 오리나무 숲에서 비둘기를 울리는지 동정 다는 아낙의 바느질 소리에 비둘기 울음이 기워지는 봄밤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낫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리는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다 어느 집인들 한 오리 근심 없는 집이 있으랴 군불 때는 연기들은 한 가정의 고통을 태우며 타오르고 근심이 쌓여 추녀가 낮아지는 집들 여기에 우리는 한줌의 삶을 기탁하러 왔다
입은 왜 먹고 말하고 사랑하는 일을 함께 하면서도 피곤하다고, 이젠 그만두겠다고 항의하지 않는가 항문과 고환은 가장 누추한 일을 하면서도 왜 파업하지 않는가 심장은 뛰고 손가락은 집고 식도는 삼키고 위는 움직인다 피는 돌고 위는 저작(咀嚼)하고 침은 삭힌다 눈과 코, 입술과 성기는 충실한 일꾼이면서 왜 쾌락을 위한 대가를 원치 않는가 새의 부리는 닦지 않는데 눈부신가 발은 머리가 되지 못했다고 불평하지 않고 손톱은 손이 되지 못했다고 화낸 일 없다 속이 어둡다고 구두를 거부한 발가락은 없다
몸은 언어를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일한다 일은 그들의 밥이고 빵이다.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아무에게도 편지 않고 석 달을 지냈습니다 내 디딘 발자국이 나를 버리고 저 혼자 적멸에 들었나 봅니다 그간 마음에 서까래를 걸고 춘풍루 한 채를 지었다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이른다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그 깊은 골짜기에 내려서지 않으면 어찌 먼지 낀 세간이 보이겠습니까 전화가 울릴 때마다 귀는 함박꽃 같이 열렬했지만 마음의 회초리 열 번 쳐 세상의 풍문에 등 돌렸습니다 법어(法語)를 읽다 주장자(柱杖子)를 부러뜨린 선승이 계신다구요 물소리를 가르고 그 속에 뼈를 세우기가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기와 같다구요 세상이 날려보내는 말들이 비수가 되어 꽂힐 때마다 자갈돌 쌓아 올려 석탑을 이루는 석공의 인고를 생각했습니다 오래 소식 주지 마셔요 깊을 대로 깊은 병이 암을 지나 보석이 될 때가 오면 햇빛같이 사실적인 편지 드리겠습니다 자꾸만 인생무상이라고 쓰려는 마음을 꾸짖으며 추운 가지에 둥지 튼 새를 쳐다봅니다 또 소식 드리지요
저 하루살이 떼들의 반란으로 하루는 저문다 나는 자줏빛으로 물든 이런 저녁을 걸어본 적 있다 강물이 잃어버린 만큼의 추억의 책장 속으로 내가 그 저녁을 데리고 지날 때마다 낮은 음색의 고동을 불며 청춘의 몇 악장이 넘겨졌다 누가 맨 처음 고독의 이름을 불렀을까 적막 한 겹으로도 달빛은 화사하고 건강한 소와 말들을 놓쳐버린 언덕으로 불만의 구름 떼들이 급히 몰려갔다 위기만큼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은 없다 깨어진 약속의 길들이 향수병을 터뜨리고 넘어진 빈 술병에는 싸구려 달빛이 담겼다 저 집들에는 몇 개의 일락(一樂)과 몇 개의 고뇌와 몇 겹의 희망과 몇 겹의 비탄이 섞여 있다 거실에서는 덧없는 연속극들이 주부들의 시간을 빼앗고 이제 어디에도 고민하며 살았던 시인의 생애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시간은 언제나 뭉텅뭉텅 가슴속의 추억을 베어낸다 그것마저 이제는 아무도 슬픔이라 말하지 않는다 어린 새가 공포로 잠드는 도시의 나뭇가지 위로 놀은 어제의 옷을 입고 몰려오고 나는 자줏빛으로 물든 이런 저녁을 걸어본 적 있다 어둠 속에서도 끝없이 고개 드는 사금파리들 그 빛 한 움큼만으로도 언덕의 길들은 빛나고 그런 헐값의 밤 속에서 호주머니 속 수첩에 기록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결코 길들일 수 없었던 통증의 저녁도 순한 아이처럼 길든다 아픈 시대처럼, 말을 담고도 침묵하는 책장처럼
어떤 사소한 글이라도 그에겐 혈흔이다 어떤 글은 병이 되어 그의 생을 쉬이 저물게 한다 아무리 작가는 말을 만드는 사람이라 해도 문학이 암보다 고통스럽다는 말은 만든 말이 아니다 가슴으로 한 말이다, 피 뱉듯 한 말이다
동서고금의 시인 작가들이 다 생을 채색하며 살다 갔지만 그들이 남긴 수천 수만의 미사여구도 읽고 난 뒤 수삼일 안에 캄캄한 페이지 안에 갇힌다
그러나 어제 암으로 죽은 작가의 말 한 마디는 나의 뇌리에 정으로 박혀 있다 손잡아 길 인도할 사람 없는 칠흑의 밤길을 등불도 없이 걸어간 사람의 말이 또 불면을 데리고 온다
어디 뻘과 진창 구렁텅이 물웅덩이가 있는지도 모르고 별의 말을 캐며 가는 사람 사람들이 시장으로 달려갈 때 그들은 문장 속으로 걸어간다 사람들이 황금을 암보다 무서워할 때 그들은 문학을 암보다 고통스러워한다 멋지게 잘 사는 꿈 한번 꾸지 않은 사람 있으랴 미식과 숙면과 향연을 마다할 사람 있으랴 그러나 스스로 고통을 수저질하며 사는 사람 있다 먼저 간 작가여 바람이 잎사귀를 흔드는 지상에서 오늘 밤에도 그대 남긴 말 다섯번째 베껴 쓰는 사람 여기 있다
*- "문학이 암보다 고통스럽다" 작고한 소설가 박영한이 죽기 전에 한 말.-
나는 별이 뜨는 풍경을 삼천 번은 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별이 무슨 말을 국수처럼 입에 물고 이 세상 뒤란으로 살금살금 걸어 오는지를 말한 적이 없다
별이 뜨기 전에 저녁쌀을 안쳐놓고 상추 뜯으러 나간 누이에 대해 나는 쓴 일이 없다
상추 뜯어 소쿠리에 담아 돌아오는 누이의 발목에 벌레들의 울음이 거미줄처럼 감기는 것을 말한 일이 없다
딸랑딸랑 방울을 흔들며 따라오던 강아지가 옆집 강아지를 만나 어디론가 놀러 가버린 그 고요함을 말한 일이 없다
바삐 갈아 넘긴 머슴의 쟁기에 찢겨 아직도 아파하는 산그늘에 대해, 어서 가야 하는데, 노오란 새끼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벌레를 잡지 못해 가슴을 할딱이는 딱새가 제 부리로 가슴 털을 파고 있는 이른 저녁을 말한 일이 없다
곧 서성이던 풀밭들은 침묵할 것이고 나뭇잎들은 다소곳해질 것이다 부엌에는 접시들이 달그락거리며 입 닫은 딱새의 말을 대신 해줄 것이다 별이 뜨면 사방이 어두워져 그때 막내별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문간으로 나올 거라는 내 생각은 틀림없을 것이다
별이 뜨면 너무 오래 써 너덜너덜해진 천 원짜리 지폐 같은 반달이 느리게 느리게 남쪽 산 위로 돋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틀림없을 것이다
별이 뜨면 벌들과 딱정벌레들이 둥치에서 안 떨어지려고 있는 힘을 다해 나무를 거머쥐고 있는 것을 어둠 속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별이 뜨면 귀뚜라미가 찢긴 쌀 포대에서 쌀 쏟아지는 소리로 운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나는 한 마디만 더 붙이려고 한다.
이것들이 다 별이 뜰 때, 별이 뜨면 생기는 일들이다
오늘도 나는 산새만큼 많은 말을 써버렸다 골짜기를 빠져나가는 물소리만큼 많은 목청을 놓쳐버렸다 손에 묻은 분필 가루를 씻고 말을 많이 하고 돌아오며 본 너무 많은 꽃을 매단 아카시아나무의 아랫도리가 허전해 보인다
그 아래, 땅 가까이 온종일 한마디도 안 한 나팔꽃이 묵묵히 울타리를 기어 올라간다 말하지 않는 것들의 붉고 푸른 고요 상처를 이기려면 더 아파야 한다 허전해서 바라보니 내가 놓친 말들이, 꽃이 되지 못한 말들이 못이 되어 내게로 날아온다
아, 나는 내일도 산새만큼 많은 말을 놓칠 것이다 누가 나더러 텅 빈 메아리같이 말을 놓치는 시간을 만들어놓았나
아서라, 너는 왜 노란색에다 네 잠언을 매달려고 하느냐 누가 검정 색은 어둠이라고, 붉은색은 열정이라고 말했느냐 오늘 다음 올 날을 내일이라고 명명한 사람은 누구냐 누가 네 침대에 함께 자는 사람을 아내라고 말했느냐 아서라, 너는 왜 세상을 네 말의 상자 속에 집어넣고 그것을 시라고 말하느냐 소년이 아이를 낳으면 왜 안 되느냐 뿌리가 하늘을 쳐다보면, 새가 거꾸로 날면 왜 안 되느냐 들판에는 가끔 오는 편지처럼 가끔 피는 꽃 장롱의 성은 남성이냐 여성이냐, 집의 내역을 잘 알면서도 장롱은 왜 온종일 함구해야 하느냐 풀들이 자아도취의 꽃을 피울 때 흙들이 내는 소리를 너는 듣느냐 아서라, 수요일은 왜 한 주일에 두 번 오면 안 되느냐 그만 먹어라,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음악을 단층은 너무 단정해 눕기가 거북해 발들을 이 층으로 길어 올리는 계단은 그래서 바빠 주문처럼 불길한 말은 쓰지마 너무 익숙해져 버리면 타성이 와 봄이 일찍 떠나면 나무의 눈물이 보여 그 때 너는 무슨 자세로 돌 위에 앉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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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나무에 깃든 삶들은 아무리 노래해도
목쉬지 않는다'
'이제 햇볕을 뒤로 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
별을 만져야 한다'
'나뭇잎이 짜 늘인 그늘이 넓어
마침내 그것이 천국이 되는 것을'
시 잘 읽고 갑니다. 시인이 의미하는 천국을 어렴풋이 느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