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갑기보다는 무덤덤한 딸이다.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혔다는 핑계도 있지만, 선친이 가족을 제일 힘들게 했던 마지막 1년 동안 아무 도움이 못 되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힘들다. 독박으로 노인 모시는 수고를 한 동생에게 자유시간을 주고 싶었다. 겸사겸사 가족여행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하지만 여러 식구가 움직이려니 마음처럼 엄마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미국시간에 맞춰 일하고 우리 부부도 사람 만날 약속을 계속 잡게 되어 외출이 잦았다. 나이가 들면 서운한 일이 느는지 엄마한테 또 나가니볼멘소리를 계속 들었다.

 

한 달 동안 엄마랑 무엇을 했나 되새겨 보았다. 엄마와 아침 먹고 산책, 아버지 산소 방문, 몇 번의 외식, 임영웅 콘서트를 보러 상암경기장에 다녀온 것 말고 특별히 한 것이 없다. 마침 동생 가족이 강원도로 여행을 떠나 차편이 없었다. 엄마를 모시고 전철로 콘서트를 가야 하는 숙제가 생겼다. ‘IM HERO-The Stadium’ 공연 표를 간신히 구해 가수의 팬클럽인 영웅시대에 동참할 수 있었다. 얼떨결에 가수를 상징하는 파란색 물결에 흠뻑 젖은 하루를 보냈다.

 

콘서트 전날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가 집에 없다. 깜짝 놀라 여기저기로 전화를 걸었다. 예행연습 삼아 지하철로 콘서트장에 혼자 다녀오는 길이란다. 영웅시대가 안내해서 물도 얻어 마시고 편안히 집에 오는 중이니까 걱정하지 말란다. 구순이 내일모레인 엄마를 보면 사람이 뭔가에 확 꽂히는 건 한순간이구나, 싶다. 삶의 열정에는 마침표가 없다더니 바로 우리 엄마 이야기일 줄이야. 집에 돌아온 엄마는 콘서트에 가져갈 배낭을 싸느라 분주하다.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로 우산을 챙기고 밤늦은 시간에 끝날 걸 대비한 겉옷과 간식, 방석을 챙긴다. 응원봉과 파란 점퍼는 필수이다.

 

가수의 덕질을 시작하며 아버지 돌아가시고 무기력하던 엄마가 더 이상 아니다. 이왕이면 우리 영웅이를 도와야 한다며 물은 그가 광고하는 삼다수를 마시고 본죽을 배달받는다. 음료는 정관장의 홍삼드링크이며 은행도 진즉에 하나은행으로 바꿨다. 여기저기서 얻은 가수의 입간판과 사진이 집안에 차고 넘친다. 가수에 대한 어떤 뉴스 하나라도 놓칠까 염려하여 전화기를 들고 사신다.

 

엄마의 팔을 부축하고 빗속에서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5만 인파가 한꺼번에 나오는 상암경기장 역은 붐빌 터이니 다음 역인 마포구청까지 걸어가서 지하철을 타라는 안내를 받았다. 고관절 수술을 받아 지팡이에 의지하는 엄마가 언제 다리 아프다고 할지 몰라 아슬아슬했다. 전철 속은 파란 티셔츠를 입은 가수의 팬들로 가득 차 있다. 피곤하지도 않은지 엄마는 옆에 앉은 아주머니와 콘서트의 여운과 감동을 얘기하느라 바쁘다. 누구의 바라기가 되는 것은 나와 결이 맞는 대상에 애정과 관심을 쏟고 행복감을 맛보는 것이리라. 나중에 임영웅 굿즈로 받은 우비를 입고 응원봉을 흔드는 엄마의 사진을 보았다. 천진한 어린아이의 행복감이 드러난 사진을 보니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식물이 무성하던 잎과 꽃을 다 떨구고 마침내 겨울 나목으로 남는 것처럼 늙은 엄마를 보면 나도 가야 할 늙음이구나 싶어 서글픈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내 인생의 고비마다 주저앉지 않도록 물심양면으로 울타리가 되었던 엄마, 고마워요. 나도 이순의 나이를 지나고 보니 짧은 봄날 같은 우리의 생, 마음 편하게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여생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지금까지 건강을 잘 유지해 왔으니 유쾌한 하루하루 재미있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미주중앙일보 [열린 광장] 202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