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독자이기도 한 재미수필가 최미자(崔米子) 씨가 지난 9월 25일 남가주 샌디에이고 ‘한국의 집’에서 네 번째 수필집 《날아라 부겐비릴아 Ⅱ》의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작은 사인회’.
《월간조선》은 지난 3월호에 최 씨의 수필집을 소개하며 미네소타 의과대학 전 학장인 닐 골트(Neal L Gault. Jr.) 박사의 이야기를 담은 ‘닥터 골트’를 게재했었다.
그녀는 전남여중고와 경북대 사범대 화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장성 황룡중과 광주 중앙여고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1987년부터 샌디에이고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곳 퍼싱중학교와 엘카혼 교육구에서 보조교사로 근무했다. 앞서 《레몬향기처럼》(2007), 《샌디에고 암탉》(2010), 《날아라 부겐빌리아 꽃잎아》(2014)를 펴냈었다.
최 씨는 출판 기념회를 마치며 ‘왜 글을 쓰는지’에 자문자답한다. 그리고 “아직 좋은 작가가 있고, 책을 읽는 독자가 세상에 있음”을, 아울러 “좋은 스승과 책이 참 사람을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간절하게 믿어본다. 아무래도 그녀의 다음 작품집을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결코 외롭지만 않던 날
- 최미자
작은 행사를 준비하며 워낙 신경을 썼던 탓인지 이틀 전 갑자기 눈에 이상이 왔다. 다행히 안과 검진 후 괜찮아 예정대로 샌디에이고 ‘한국의 집’에서 책 사인회를 가졌다. 그런데 다음날 일상과 달리 새벽에 깨었다. 4시 반이다. 스트레스나 과로, 무리하면 절대 안 되는데, 심호흡을 하며 더 잠을 잤다. 가족들도 모두 피곤한 기색이다. 들고 온 짐 꾸러미들을 풀며 잠시 돌아본다.
수년 전, 남편은 가끔 심통이 나면 “글을 쓰면 돈이 나와!”라면서 여기 저기 열심히 글을 써 보내는 나에게 했던 기억이 나 문득 나는 피식 웃는다. 그럴 때마다 생산성이 없고 비경제적이라는 그이 말에 나도 동의했다. 그런 그이가 지금은 확 달라졌다. 얼마나 내 책을 알리려고 애쓰는지 모른다. 첫 번째 책 사인 판매는 로스앤젤러스 한인타운에 있는 피오피코 도서관에서 했다. 그때도 문인들은 물론 한인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친구가 와 10권 사주고 문인단체장이 왔기에 조금 기부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샌디에이고 라호야에 있는 미국인 도서관장이 열자고 하여 다과도 준비했다. 남편이 당시 만돌린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고 있었기에 단장과 지인이 와서 축하 연주도 했다. 미국인 이웃들이 왔지만 한인은 거의 없었다. 그런 서러운 경험을 해본 나는 사인회를 연다는 일은 두려운 모험이라고 느꼈다.
최미자 씨의 수필집들. 왼쪽부터 《레몬향기처럼》(2007), 《샌디에고 암탉》(2010), 《날아라 부겐빌리아 꽃잎아》(2014), 《날아라 부겐비릴아 Ⅱ》(2022)
다행히도 두 번째 책이 나온 이후로 뵌 적 없는 한국의 기자로부터 이메일로 원고료를 받는 칼럼을 일 년 쓴 기회가 있었다. 그 후 신문사는 바뀌었지만 지금까지 미국 한인 신문을 비롯하여 글을 쓰는 행복을 나는 누리고 있다. 그런 연유인지 몰라도 작가라며 나를 인정을 해준 남편은 그동안의 무심함에 미안해하며 세 번째 책 출간비용은 자기가 내겠다며 성화였다. 그런데 나는 xx 언론 문화재단에 응모하여 선정되었다. 믿기지 않던 내 이름이 현직 기자와 언론학 교수들 속에 선정되어 들어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누가 심사위원일까. 지금도 생각하면 난 감격스럽다. 하긴 여러 해 동안 여기저기 잡지와 신문사에 기고했으며 또 샌디에이고 라디오방송에서는 좋은 책을 낭송했다. 바르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 글을 써서 봉사하는 목적으로.
책을 낼 때마다 나는 책 속의 내용을 장으로 가르고 제목을 정하는 일은 물론,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디자인도 구상했다. 처음 두 책은 친정어머니의 수채화 그림을 넣었다. 세 번째 책은 우리 집에 있는 부겐빌리아 꽃나무 사진이다. 만발할 때마다 너무 곱고 신기해 바라보는 꽃이었다. 표지에 꽃잎이 날아가는 모습을 디자이너와 멀리서 감수하노라니 두어 달이 걸렸다. 지쳐버린 나는 다시는 책을 안내겠다고 말해놓고 또 8년 만에 네 번째 책을 만든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흘러가야 하는 내 묘한 운명의 물결.
왼쪽 두번째부터 SD 한미교류협회 정병애 회장, ‘한국의 집’ 황정주 회장, 최미자 작가, 최 작가의 딸 김수연 씨.
왜 나는 또 글을 쓰는가. 점점 더 요상해지는 세상 걱정에는 전혀 관심 없고, 제 가족만 또는 혼밥을 먹으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 편리하다는 전화기에 빠져 QR 코드로 음식을 주문하며 자신의 사생활이 여기저기 노출되는 심각함도 모르는 무감각한 주변 생활에 난 놀란다. 편리하여 전자파가 강한 전화기만 바라보며 기계바보가 되어가는 현대인들이 참 슬프다. 잠을 자고 일어나니 기름 값이 1달러나 급등해 7달러가 되어있다. 전기 차의 소모품인 배터리 문제는 말하지 않고 전기차를 쓰라며 압박하는 가주(加州) 정부의 시책들도 속상하다.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길거리의 정신병자와 거지는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도 잘 살고 있다. 왜? 궁금하다.
지난해엔 우연히 잘나가는 여 조카가 이십년이나 살고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편은 명문 S대 출신 아내는 명문 E대를 나온 커플이었다. 교육열도 높아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캐나다 조기유학을 갔었지만, 자식은 문제아가 되었다고 한다. 문득 그들이 사는 거실에는 책 한 권 없이 말끔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주말이면 음악회나 영화를 보러가던 멋쟁이 부부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들의 이혼 소식이 놀랍지 않았다. 왜냐면 영혼을 키워주는 정신 교육을 부모는 자녀에게 넣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 중에 누가 진짜 문제일까. 내 딸아이는 한국에 사는 동안 서점에 자주 들려 집에 올 때면 두 가방 가득히 책을 사서 담아들고 왔다. 사정상 박사학위도 다 끝내지 못했고 본인의 꿈도 아니었지만, 십년간 대학에서 뜻밖에 강의하는 일을 덤으로 했다. 좋은 스승과 책은 한 인간으로 참 사람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지난 8월경부터, 나는 수년전 건립기금에도 동참했지만 평생 후원회원이기도 한 HoK(샌디에이고 발보아 파크에 있는 국제평화의 집- 한국관 2021년 개관)를 후원하려고 작은 사인회를 준비했다. 샌디에이고의 한인 신문과 월간지에서는 두 번이나 책 소개를 해주었다. 지역 인터넷(sdsaram.com)에도 소개되었다. 행사 날, 자원봉사자인 두 학부모인 유혜원·신희정 님이 첫 구독자가 되었지만 거의 한인은 들르지 않았다. 4시가 다 되어 한미교류협회 정병애 회장이 약속대로 방문했다. 그리고 고마운 나의 몇 지인들이. 여러 한인교회에서 행사를 할 때면 얼마나 북적거리곤 하지만, 그날은 오겠다던 사람들까지 펑크다. 법우인 무가혜 보살은 장소를 찾느라 힘들었다며 콧등의 땀을 닦았다.
오히려 한국말 몇 마디 하던 외국인 젊은 방문객들이 우리 애랑 영어로 한국에 대하여 묻고 대화하여 한동안 북적거려 참 보기가 좋았다. 아침에 집을 출발하며 딸애는 봉사가 된 18살 강아지를 망사 가방에 넣으면서, 한 권이라도 팔리면 다행이라며 혹시 행사로 내가 상처 받을까 위로했다. 만약 책이 안 팔려도 내가 마음먹은 작은 액수를 기증하려고 했으니 문제는 없었다.
고맙게도 오랜 세월, 나에게 우편으로 내 책을 구입하여 수년간 독자가 되어준 분들이 있다. LA의 김혜택 님(유별나 가게 대표), 지금이라도 넒은 장소에서 독자와의 만남의 장을 만들라던 이청환 사장님(전 FARKAS 대표, 한인회장, 그리고 나의 글 펜)의 격려금, 가든 그로브의 길벗 약국(최무식 대표), NY에 사는 친구 정희와 명자, 책을 받고 찬조금을 보내 온 LA의 박복수 시인, 이현숙(재미수필협회장), 이웃인 김용필 사장 부부 등등. 모두 눈물 나게 고맙다. 그래도 아직 좋은 작가가 있고 책을 읽는 독자가 있는 세상이 있다고. 그리고 고민한다. 종종 일어나는 좌절감이나 절필하려 하지 말고 계속 난 글을 써가야 하나…
큰 일을 해내셨습니다.
작은 거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최미자수필가님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