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십년의 민남
이종운
우리 삶은 만남의 연속이라 해도 관언은 아닐 것이다. 애써 만들거나 우연히 스쳐 지나가다 만나기도 한다. 만남은 행복, 충실, 소중,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망각, 회한, 슬픔 등 인생의 희노애락(喜怒哀樂)과 궤(軌)를 같이 한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스쳐 지나가듯 부서가 다른 직장 선배 동료 S 형을 만난 것은 1966년이었으니 반세기가 넘었다. 퇴근후, 서너명이 어울려 식사도 하고, 노래방에 들러 노래 부르기도 했다. 특히, S형은 ‘Yesterday’와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등 팝송을 아주 멋들어지게 잘 불렀다. 나는 그만 황홀해 그에게 빨려 들어갔다. 큰소리로 앵콜을 외쳤고 그는 노래로 화답했다.
그뒤, 연배인 그를 나는 자연스럽게 ‘형’이라 불렀고, 그는 스스럼없이 친동생 부르듯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가 좋았고, 그도 나를 아우처럼 대했다. ‘버릇없다.’라고 할 수도 있는 언행에도 그는 단 한번도 표정이 달라진 적이 없었다.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술잔이 오가다 보면 때로는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 지 모르게 주정부리는 친구도 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듯, 성낼 법도 한 상황인데도 그는 언제나 조용 했다. 그의 과장 없는 말씨와 온화함이 좋았다. 그가 해외 주재 근무 발령으로 한국을 떠날 때까지 우리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출장 차 간 나는 그의 주재 근무지 방콕에서 짧은 재회를 마친 뒤, 귀국하자마자 나도 새로 지점을 개설 하는 하와이로 전근 발령이 났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볼 기회는 어려워 졌다. 서울 본사에서 개최하는 회의나 교육에 참석하게 돼 재회의 기회도 있었고, 70년대 초, 민간 기업 해외 주재원도 새마을 의무교육 에 참석했을 때는 그와 같은 반에서 교육을 받았다.
서로 다른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주재 근무하던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L. A.에서였다. 나를 그의 후임으로 발령낸 것은 전생의 인연 또는 신의 뜻이라 생각했다. 만나자마자 또 헤어질지라도 무척 반가 웠다. 업무 인수인계를 끝내자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양 사직서를 냈다. LA에 남아 교포로 살겠다는 것이었다. 더이상 같은 직장 동료 선배가 아니게 된 게 혼란스러웠다. 또, 당장 직장이 없는 형의 처지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곧, 전직과 현직, 형과 아우로 자주 만나 식사도 하고, 차를 마시며 옛날 얘기 를 나누며 지냈다. 얼마되지 않아 직장도 갖게 되고 삶의 안정도 누리게 된 형을 바라보는 나는 하늘을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새월은 빨랐다. 어느새 3년이 흘렀다. 본사 근무 발령으로 LA를 떠나 귀국하는 나를 형은 공항까지 나와 배웅해주었다. 형은 “우리 또 만나게 될거야!” 하며.나를 껴않았다.
강산이 변해도 서너 번은 족히 변했을 세월을 미국, 일본, 프랑스, 스위스 등 외국에서 보내다 귀국한 80 년대 말, 조국은 더이상 개발 도상국은 아니었다. 외양은 선진국과 다를바 없었지만, 속살은 여기저기 군사 문화로 두꺼워진 상태이었다. 낯설었다. 이런 시각에 주변 동료들은 “국내 교육, 다시 받아야 겠다.” 라고 한마디씩 했다. 태어나자마자 외국에서 자란 아들의 장래도 깊게 생각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귀국 1년만에 평생을 함께 할 직장을 그만 두고,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S형과 같은 L.A. 교포로 다시 만났다. 여전히 반가웠다. 그는 옛그대로였다. 나는 그런 그가 좋았다. 이민 선배인 그에게 불시에 회사를 그만두면서 가졌던 느낌을 물어보았다. ‘지나간 일’이라 했다. “앞으로 교포로 살아갈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 했다. 그렇게 우리는 옛날의 형과, 아우로 변함없는 사이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우리는 또 자주 만나기 시작했다. 어느날. 나는 갑자기 그의 깊은 내면세계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영어와 일본어를 아주 잘하고, 혜박한 업무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 말고는 그의 내면 세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출생지가 어디인지, 어느 학교를 졸업 했는지도 모르고, 50여 년을 그렇게 지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의 스펙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다. 평소 조용한 그의 성격 탓도 컸지민, 남의 일, 특히 집안 사정, 성장과정에 대하여 꼬치꼬치 케묻지 못하 는 나의 성격 탓도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자마자 고향과 출신교, 또는 동성동본 등, 동질성과 유사 성을 확인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 못되는 나의 성격 탓이기도 했다. 또, 그것이 예의이고,‘남의 프라 이버시를 존중해주는 것이 옳다.’ 라는 생각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었다.
사실, 스펙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일인지 회사생활을 통해서 벌써부터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성격을 맞춰가는 진심어린 아부도 어느 정도 할줄 아는 나이에 이르기도 했을 터였 지만, 그냥 모르는 채 그대로가 좋았고 더 편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엘에이 한인타운 식당에서 만난 그가 나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만날 때마다 자신이 지금까지 읽었던 책, 몇 권씩을 교환하자고 했다. 그 책을 다 읽고 난 후, 돌려주고, 또 다른 책을 교환하기를 반복 하자는 것이었다. 환영했다. 내가 빌려준 책들은 주로 정치, 사회, 경제, 종교, 마케팅 등에 관한 책인데 비해 그 의 책은 거의 문학에 관한 책이었다. 그리고 밑줄 그은 부분이 유난히도 많았다, 감동, 공감하는 문장마다 밑줄 친 부분에서 적나라하게 그의 인생관, 세계관과 더불어 정의롭고 아름다운 마음씨 까지 읽혔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또, 문학의 모든 것은 한마디 로 축약(縮約)한다면 어떻게 사랑하며 사는가에 귀착(歸着)한다.’에 밑줄쳐친 것으로 보아 그의 문학에 대한 생각과 인성을 깊이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랑에 관한 시인 릴케가 어느 시인 지망생에게 보낸 편지 모음에서 ‘사랑은 우선 홀로 성숙해지고 나서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이라는 문장에 그는 밑줄을 그었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시(詩) ‘당신을 어떻게 사랑 하느냐구요? 방법을 꼽아 볼게요.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만큼, 넓이만큼, 그 높이만큼 당신을 사랑 합니다.’라는 문장에도 밑줄이 그어저 있었다. 그의 성품을 또한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자식 셋을 데리고 동반 자살한 한 어머니에 관한 기사를 보고 쓴 어느 수필을 읽고 ‘돈 많고 힘있는 사람 끼리 모여 동그랗게 금 그어 놓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밀쳐내며 사는 이 세상에 자식들을 두고 가기가 너무나 무서웠는지도 모른다.’에 그은 밑줄은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부조리한 사회현상에 대한 탄식 과 분노를 삭히는 그의 모습이 밑줄과 오바렙되어 나를 자극했다.
나는 갑자기 멈짓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치 남의 물건을 훔치다 들킨 기분이 들었다. ‘가장 악한자는 남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하는 자’라고 작가 ‘너세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이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에서 경고한 문구가 떠올라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 밑줄 친 문장으로부터 그를 새롭게 발견하였다. 이 세삼스러운 만남이 전에 없이 기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