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에 대한 단상

이 종 운

 

오래전 조국을 떠나 외국에서 사는 나는 언어 때문에 애로사항을 많이 겪고 있어서 평소 말과 문자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특히 말은 상대와 상황에 따라 화자(話者)의 진정한 의도와는 달리 그 정보와 감정이 애석하게도 정확히 전달되지 못할 때가 많이 발생한다. 그렇기에 사유체계에 언어의 구조를 끌어들인 프랑스 철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 ‘언어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를 의도한 대로 전달하지 못할 팔자를 타고났으며, 이 핸디캡을 고스란히 안고 기능하므로 인간의 욕망이 싹텄다.’라고 설파했나 보다.

 

지난달 독서회 모임에는 한국에서 온 젊고 잘생긴 한 청년이 참석하였다. 독서회 회원인 그의 고모와 함께였다. 그는 한국 S 기업의 사원으로 출장차 미국에 왔다가 귀국길에 고모 집에 들렀다고 했다. 그날도 20여 명의 회원이 모여 푸짐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싱어롱 순서에 이어, 독후감 발표가 있었다. 벌써 20년째 이어오는 동네 모임으로 회원 참여도도 높고 모두 서로 돈독한 사이여서 형제처럼 지낸다.

 

이날 모임이 거의 끝날 무렵 한 회원이 한국에서 온 젊은 손님으로부터 독서회에 참석한 소감도 잠깐 들어보면 어떠냐." 라고 했다. 회원 모두가 박수로 환영했다. 그 청년은 다시 한 번 재촉을 받고서야 입을 열었다. “고국을 떠나와서 이렇게 동포애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흐뭇한데 독후감을 발표하고 토론까지 하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쓰시는 한국말은 분명 한국말인데 어딘가 생소하게 들려서 아까부터 왜 그럴까 하고 곰곰이 생각 중이었습니다. 연변 조선말을 처음 들었을 때 경험했던 그런 생소한 느낌이라 할까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회원들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것이었다. 회원들은 큰 충격을 받은 듯 서로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공식적인 독서회 모임이 끝나자, ‘괜한 말을 했나?’ 하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 청년은 그의 고모와 함께 먼저 자리를 떴다. 그러자 한 회원이 볼멘소리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아니 우리가 하는 말이 연변 조선말처럼 생소하게 들린다고? 매일같이 한국어로 방송되는 라디오도 듣고, TV도 시청하는 처지인데!” 그 청년의 말에 수긍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곳 미국에서 쓰는 한국말이 모국의 그것과 달리 생소할 이유가 전혀 없을 터라는 불평에 모두가 동의하는 듯했다.

 

이민 온 지 오래된 한 회원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국말은 이민 오기 전 7~80년대 사용하던 한국말일 것이다. 게다가 자신도 모르게 일상화된 영어단어가 불쑥불쑥 섞여 나오니 그렇게 들렸을 것이니 무리는 아닐 거라고 청년을 두둔했다. 그런데도 이상한 쪽은 오히려 모국 쪽인 것 같다라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회원은 우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한국어는, 먼 훗날 연구대상이 될 소수 언어나 방언으로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못내 씁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회원들은 한국 TV 드라마에서 유행하고 있는 이상한 말들에 대한 불만을 종종 털어놓곤 했었다. 분명 남편인데도 해괴망측하게 오빠라고 부르는가 하면, 대접하겠다는 말을 왜 쏜다.’ 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이었다. 인터넷에서 통용되는 말은 짐작하기도 힘든 것이 한둘이 아니라며, 이민 떠나 올 당시 모국에는 분명 그런 말들은 없었다고 서로 확인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청년의 방문으로 언어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발전 또는 퇴보하며 변화한다는 속성을 새삼 실감하는 기회가 된 것 같기도 했다. 바로 그 변화의 현장에 자신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지한 한 회원은 고국으로부터 멀리 떠나 와 있다는 거리감을 재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태평양 바다가 과연 넓긴 넓은가 봐!’라며 씁쓸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사실 공교육이 아무리 언어를 순화시킨다 해도 드라마 등 대중매체가 언어를 함부로 다룰 때는 현실적으로 어찌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대중매체의 언어는 그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불가피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나라의 품위 있는 국어는 한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적 유산의 버팀목이라는 믿음을 쉽게 접을 수 없는 독서회 회원들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범람하는 품위 없는 인터넷 언어들을 어떻게 정화할 것이며, 현재 모국에서 불고 있는 영어몰입 교육의 현실도 과연 바람직할까? 우리의 고유 언어, 문자 보존에 대한 정부 당국자나 국어학자의 고민이 보통이 아닐 것 같다는 말도 나왔다. 또 이민 1세대가 훌쩍 지난 뒤 우리 후대의 미주 한국어는 어떤 모양일까? 혹시 인터넷 신조어와 영어가 범벅돼 새로운 혼성 언어로 변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미주 한인들의 한국말도 연변 조선족의 조선말’,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위성국에 흩어져 사는 한인 동포의 고려 말처럼 특정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씁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모국의 한국어도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고 우려된다고도 하였다.

 

70년대 말 스위스 주재 근무하고 있을 때 나는 그라우뷘덴칸톤()을 찾았던 일이 떠올랐다.

BC 58, ‘시저가 지금의 스위스인 헬베티아를 정복한 후, 통치수단의 한 방편으로 로마 제국의 속주(屬州)라에티아주민을 이주시켰던 곳이 그라우뷘덴이다. 그 후손들은, 아직도 그들만의 전통 생활양식과 함께 기원전 당시의 언어인 로망시어를 말하며 대를 이어 사는 곳이다. 주민이라야 스위스 전 국민의 1할도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소수 국민이 사용하고 있는 이 로망시어를 스위스는, 1938년 독일어, 불어, 이탈리아어에 이어 네 번째 국어로 헌법에 확정해 놓았다. 공문서는 물론 치즈, 우유병 등 각종 상품의 상표와 설명서에는 번거로울 정도로 일일이 4개의 언어로 표시하고 있었다.

 

당시, 오직 수출과 국가 경제 부흥만이 최고선(最高善)이라고 단단히 의식화된 해외 주재원의 한 사람인 나는, 소수언어 보호와 순화 정책에 자원 보존 못지않은 차원의 많은 경비를 쓰고 있는 스위스가 조금은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무형의 자산을 지키고 보전하는 국민이야말로 진정 문화 국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서두에 말한 인류의 사고 변화에도 큰 영향을 준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가 괜히 스위스에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청년이 내게 주었던 충격! 한 나라 안에서도 세대 간계층 간언어적 이질감이 표출되는데, 하물며 동양과 서양의 다른 문화권에서 사는 우리가 모국어에 대한 동질감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다만 앞으로 조국과 미국에 사는 우리가 더 괴리되지 않고 얼마큼 모국어에 대한 동질감을 유지하느냐가 숙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