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이전과 이주 계기, 이주 이후의 삶
과목 중에서도 영어를 제일 못하고, 나라 사랑이 유난히 강한 내가 우리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주님의 선한 계획하심인지 나는 거의 타의에 의해 미국 이민 길에 오르게 되었다. 1983년 8월 13일의 일이었다. 그때 당시, 만약 내 인생의 최대 터닝 포인트가 된 일만 벌어지지 않았던들, 난 아직도 한국에서 아들 딸 키우며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을 게다. 멀쩡하던 네 살박이 아들이 백혈병이란 이름으로 한 달만에 갔다. 그리고 그 일을 두고 결혼 6년차였던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큰 시누이는 “받을 복이 없어서 애까지 죽었다”며 내 심장에 비수를 꼽았다. 아이 죽은 지 사흘 째 되던 날, 멀건 대낮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가정 평화를 위해 교회도 못 가고 있던 나에게 직접 찾아오신 주님. 설움과 슬픔으로 꼬박 곡기를 끊고 울기만 하고 있던 나는 또 다른 의미의 기쁜 눈물을 흘렸다. 내 나이 서른. 나는 내 인생을 재편성해야만 했다. 결혼 후 잃은 게 너무 많았다. 이혼을 했다. 그 이후, 기적 같은 일이 계속 일어났다. 아들 녀석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오래 된 수첩에서 후배 전화를 발견하게 되고, 놀러오라는 성화에 갔다가 직장까지 얻게 되었다. 외국 신부님이 원장으로 있는 ‘근로 청소년 센터’에서 교육 부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아들 하나 데려 가시고, 학교 대신 공장에 다녀야 하는 불쌍한 아이들 180명을 내게 맡겨 주셨다. 내적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내 모든 사랑과 능력을 동원하여 일을 했다. 한편, 큰 일이 있기 6개월 전에 이민 가신 어머님은 피눈물을 흘리며 이민을 권유하셨다. 그땐, 이혼 자녀를 부모가 초청할 수 있었다. 이틀이 멀다 하고 국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6개월 전, 네 명이던 식구가 두 명으로 줄어버렸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행복하다는 내 말을 어머닌 믿을 수 없으셨나 보다. 난 이민 초청 서류를 서랍 속에 넣어둔 채, 오랫동안 접수하지 않았다. 2년 뒤, 우리 근로 청소년들을 위한 모든 프로그램과 교재를 만들고 시스템화한 후에야 이민 길에 올랐다. 어머님의 사랑과, 사시장철 기후 좋다는 캘리포니아 날씨에 솔깃해진 것이다. 선택은 탁월했다. 이미, 모든 가족이 와 있는가운데 마지막으로 합류한 나는 이민의 ‘처절한’ 어려움 없이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여전히 내적 기쁨 충만한 가운데 기회의 나라 미국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수필은 왜, 언제부터 쓰게 되었나?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필연은 우연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만남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수필과의 만남도 그러했다. 1992년 초, 서탐이 심한 나는 쥐방울처럼 LA 동아서점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늬 때와 같이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던 중 수필 한 편을 보게 되었다. 아니 ‘만나게’ 되었다. 온 몸에 전류가 흘렀다. ‘아니 수필 한 편이 이토록 감동을 줄 수 있는가?’ 싶었다. 감동을 넘어 그것은 하나의 ‘경이’였다. 그때부터 나는 수필과 사랑에 빠졌다. 사랑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한국 문화부에 등록된 모든 수필 전문지를 정기 구독해서 보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고원 교수가 운영하는 글마루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수필 공부에 진입했다. 사랑은 늘 갈증을 부른다. 짧은 시간에 시, 소설, 수필 공부를 다 해야 하는 글마루는 순수 수필문학에 대한 내 갈증을 충분히 채워주지 못했다. 여러 수필집을 탐독한 끝에, 작품과 인품으로 내 마음을 잡고 있던 김태길 교수에게 국제 전화를 올렸다. 수필 통신 강좌를 해 주십사하는 청원을 드렸다. <계간 수필> 발간 준비로 바쁜 것도 있지만, 더 훌륭한 분이 많다며 윤모촌 선생과 김시헌 선생을 추천해 주셨다. 나는 이론서로 만난 윤모촌 선생께 먼저 전화를 올렸다. 칠십 초로의 연로한 연세에 안질까지 앓고 계시는 선생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네 명의 벗들 원고를 함께 모아 한국으로 보내면 윤모촌 선생은 11 바이 14 사이즈로 확대하시어 붉은 줄을 북북 그으시고 옆에다 촘촘하게 설명을 적어 보내주셨다. 2주 간격으로 주고 받던 수필 통신 공부는 선생의 건강 문제로 일 년 가까이 이어진 후 끝났다. 수필에 매료되어 수필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수필가가 되려는 욕심도 등단에 대한 욕망도 없었다. 정작 등단은 타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고원 교수와 공부한 지 6개월만에 첫 숙제로 낸 작품 <빈 방 있습니까>가 <<문학세계>>에 신인상으로 추천되고, 한국에서 온 친구가 내 작품 <겨울 바다>를 <<수필과 비평>>에 투고하여 졸지에 등단을 하게 되었다. 수필가란 이름표를 달고 수필 초등학교에 입학 한 것이다. 1995년과 1997년의 일이다. 그래도 뭔가 미흡한 거 같아, 십 년 뒤인 2007년 <<에세이 문학>>에 <새벽 전람회>를 투고하여 천료를 받았다. 필력은 딸리나, 수필 사랑에 대한 티 없는 순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게재 수필은 언제 어떤 계기로 쓰게 되었나요? 게재 수필을 통해 꼭 전하고 싶은 것은 어떤 것인지요?
<하트 풍선 선물>은 아직 지상에 발표하지 않은 작품으로, 올 2017년 2월 14일 발렌타인스 데이 저녁에 쓴 작품이다. 역시, 이 작품도 인간관계 속에서 오고가는 ‘정’에 관한 얘기이며 작품 속에 나오는 청년의 성실한 모습 역시 사람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기에 내 마음에 느낌표를 찍었다.
<기억의 저편에서>는 재미수필 15집에 연재 됐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딸과 저녁을 먹으며 나눈 이민 추억담으로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 동기는, 딸아이의 블로거에 올린 나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다. ‘나는 지는 해요, 너는 뜨는 해니 앞으로도 엄마는 너의 꽃받침이 되어주마!’란 말이 그 애를 울렸던 모양이다. 딸아이와 나에게는 남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딸아이는틴 에이저 미혼모의 몸으로 공부와 직장을 병행하며 아이를 훌륭히 키워낸 지난 세월이 있었고, 나는 오직 사랑하는 어미의 마음으로 그들을 뒷바라지해온 뜨거운 이야기가 있었다. 남다른 경험이었기에 독자랑 함께 나누고 싶어 이 작품을 썼다. 실수에도 불구하고 수용해준 엄마의 마음과 그 고마움을 알고 이십 대 청춘을 반납하며 제 삶을 ‘책임있게’ 끌어온 딸의 이민 보고서라고나 할까. 수필은 삶이 녹아 있는 ‘정의 문학’이다. 내 수필의 주제는 언제나 ‘사랑’이다. 자연과 사람과 사물에 대한 더 나아가서는 신에 대한 사랑을 증거하고 노래하고 싶다.
게재 수필 내용 이후에 변모된 사실은?
<하트 풍선 선물>은 선물을 주고 받은 두 사람과 중간 역할을 한 풍선 청년이 나온다. 우리 세 사람 모두를 기쁨과 사랑으로 묶어준 계기가 되었다. 메마른 삶이기에, 앞으로도 정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쓰고 싶다.
<기억의 저편에서>를 쓴 지 3년이 지났다. 이제 손녀는 대학생이 되었고 딸은 미 굴지의 패션 컴퍼니에서 바이어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돌아보면 모두가 주님의 은총이다. 인생이란 풍경화는 산이 있고 강이 있어야 더욱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함께 걸어나온 추억의 통로. 다시 한 번 주어진 우리의 삶에 충실해야 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많은 독자들이 뜨거운 응원과 격려를 보내 주셨다. 필력이 딸려도, 소재가 공감을 불러 일으키면 그 나름 좋은 반응을 얻는다는 경험을 하였다.
미국에서 수필 쓰기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자기 나라를 일컬어 ‘모국’이라고도 부르고 ‘조국’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언어는 늘 “조국어’라 하지 않고 ‘모국어’라고 한다. 말은 어머니로부터 배우기 때문이다. 어머니께 하루의 일상을 조잘대듯, ‘모국어’로 이국땅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우리 미주 수필가의 청복이라 생각한다. 하느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 여기고, 나의 이 작은 탈렌트가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도록 기도드리고 있다. 여일이 얼마 없는 듯하여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수필가가 되기 전과 되고 나서 어떤 것이 달라졌나요?
모든 사물이나 현상, 사람에 대해 눈 여겨 보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with love’라고 할 수 있다. 삶이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열망으로 수필을 쓰고 있다.
자기만의 수필 창작법이 있다면 ?
(소재와의 만남 + 심상에 찍힌 느낌표 + 곰삭힘 + 구성 + 퇴고)
대체로 이 형태로 이루어진다. 소재와의 특별한 만남이 어떤 느낌표를 찍으면 계속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에 잠긴다. 머리 속에서 스케치 하는 시간이 짧을 때도 있지만, 거의 십 년이 걸려 첫 줄이 나올 때도 있다. 그 다음엔, 무슨 예를 섞어, 어떻게 전개하나 하고 구성에 골몰한다. 마무리는 수미쌍관법으로 다시 한 번 매듭을 지어 준다. 제목은 때때로 본문 속의 중심 낱말로 대체하기도 한다. 크리스탈로 팔찌를 만들 때 쓰는 수법을 나 개인적으로 즐겨 사용한다. 재료를 고르고, 패턴을 생각하고, 매듭을 잘 지어 주는 것. 그러다, 패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풀어 패턴이나 색상과 모양을 달리하며 밤새가지고 노는 것. 내게 있어 쓰필 쓰기는 노동이 아니라, 놀이요 쾌락이다. 배반하지 않는 사랑이요, 벗이다.
한국 수필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수필 이론서가 요구하는 명수필의 조건이나 제약에서 무장해제하고 ‘편안하게’ 작품을 쓰면 좋겠다. 격을 높이기 위해 어려운 말을 쓰거나, 묘사를 멋있게 하기 위해 용을 쓰다 보면 몸살이 난다. 4번 타자가 홈런 한 방 치려다 스윙 아웃 당하는 꼴이다. 다 경험해 본 이야기다. 또한, 자랑거리나 좋은 이야기만 쓰지 말자. 실수나 부끄러운 이야기면 어떠랴. 수필을 통해 굳이 자기 화장을 할 필요가 있을까. 수필이 점점 '귀족화' 되어가는 느낌이다. 협회에 바라는 건, 작품성을 고려하여 상을 주지 알음이나 공로를 따져 문학상을 남발하지 않았으면 한다. 덧붙여, 여기 수필 강사로 올려면 제대로 준비해서 와 줬으면 한다. 질문할 게 없다. “Where's the beef?”라고 되묻고 싶을 때는 정말 실망이다. 연인을 기다리듯 ‘설레며’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순정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