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세필 화가가 내 사진을 스케치 해 줬다.

채 1분이 안 걸리는 시간이었다.

돈도 받지 않았다.

페이스북 클릭 한 번으로 완성된 내 초상화들.

좋은 세상이다.

30분간이나 서울 인사동 어느 귀퉁이에  앉아 돈까지 쥐어주며 그려온 언니 초상화.

그에 비해도 별 손색이 없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표정은 살아 있네?'

나도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말에 연상 작용이 일어, 문득 작고 시인 이숭자 선생이 생각났다.

생활에 쫓겨 근 30년간 펜을 놓았던 그를 한국에서는 '작고 시인'으로 분류했다.

선생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분연히 일어나서 피 토하듯 시를 썼다. 

<내 여기 살아 있소>라는 시다. 

 

- 고국을 떠나 서른 해에/ 이미 그 땅에선/ '작고 시인'으로 나뉘었다는데/ 여기 죽음 없는/ 부활이 있어/ 돌멩이같은 겨울무 하나/ 노오란 속잎 달고 나왔다/ 귀환을 반겨/ 푸른 나뭇가지마다/ 옐로우 리본을 걸고 기다리는/ 이국 풍경은 아니라도/ 친구여/ 내 여기 살아 있소/ 돌멩이 같이 살아 있소  

 

70이 넘은 노시인의 절규였다.

그 이후, 선생은 '작고 시인'이 되지 않기 위해 수많은 시집과 명시조를 남기고 아흔 중반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으면 '작고 시인'이나 진배 없다는 것을 그때 나는 뼈저리 느꼈다.

어디 시인 뿐이겠는가.

우리 누구든, 자기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모두가 이름 앞에 '작고'라는 불명예 고깔을 쓰게 되지 않을까.

아직도 건강하고, 움직일 수 있음에 감사한다.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늘 시퍼런 고등어 등살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싶다.

표정 하나도 어줍잖게 여기지 않고 밝은 표정을 유지함으로써 내가 즐겁고 그로 인해 보는 이에게 기쁨을 주었으면 한다.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이름을 알 리도 없는 익명의 세필 화가가 살아 있는 표정을 돌려줌으로써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내 직무를 일깨워 주었다.

내 삶에 직무 유기를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