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 친구가 적성에 맞는 직업 찾기 사이트를 가르쳐 주길래 눌러 봤더니, 1초도 안 되어 'president'로 나온다.
세상에! 이런 변이 있나? 마이크 공포증이 있어 수필 강좌도 앉아서 하겠다고 양해 구하는 내가? 가슴이 울렁거려 남 앞에서 솔로 노래 한 번 제대로 못 부르는 내가 '대통령?' 말도 안 된다.
손님이 와서 잠깐 글쓰기를 멈춘 사이, 똑똑한 친구가 그단새 광의의 번역을 하여 꼭 '대통령'이 아닐 수도 있다며 풍선에 바람을 뺀다. 아무튼, 반장이든 회장이든 '우두머리'가 적성에 맞는 직업이렸다? 기분이 나쁘진 않다. 혹 아는가. 내 안에 잠재적 '우두머리' 유전 인자가 들어 있어 놀래킬지. 하지만, 그런 날은 없지 싶다.
난, 늘 2인자로 머무길 원한다. 꽃이 있으면 꽃받침도 있어야 하는 법. 언제나 꽃받침이 되길 원할 뿐, 단 한 번도 꽃이 되기를 원해 본 적이 없다. 내 앞에 앞서가는 자가 있어야 안심이 된다.
참모격이라면 나도 자신만만하다. 이미, 나는 중학교 때 내가 찬조 연설을 하여 친구를 학생 회장에 당선시켜준 귀한 실적이 있다. 딱 한 번의 경험이지만, 내 이력에 한 줄 올려야만 할 정도로 내겐 경이로운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이전에 천지개벽할 일이 일어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 가자마자, 내가 반 회장으로 뽑힌 일이다. 그것도 뒷배경이 대단한 네 명 후보자와 경선을 치루어 일구어낸 '지대한' 성과였다. 더우기, 일어나서 책도 제대로 못 읽던 주제에 '간단 명료한 스피치'를 통하여 당당히 당선됐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사실, 3학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일어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려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런 나를 두고, 3학년 담임 선생님은 내가 한글을 아직 깨치지 못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뿐인가. 고무줄 뛰기라 하면 펄펄 나는 선순데도, 누가 청하지 않으면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전형적인 소심증 A형이었다. 덕분에 '말이 없고 얌전한 아이'로 통했다. 현재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이 없고 조용한 아이로 있는 덕분에 초등학교 일학년 때는 반 6등으로 턱걸이 우등상을 받기도 했다. 6,7등 평균 점수는 같았지만, 행실면에 앞서 우등상을 타게 됐다고. 그나마 2학년 때부터는 3등 까지만 우등상을 주었기에 그것도 치열해졌다. 이런저런 곡절을 지니고도 어찌어찌하여 3년 우등, 3년 개근상을 받고 4학년으로 올라갔다.
4학년으로 올라가자, 세상은 더 크고 넓어졌다. 신마산 변두리에 있던 우리 월포 초등학교는 학군 개편으로 번둣한 아이들과 전근오신 선생님들로 북적댔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이고 교장 선생님은 먼저 각 학년과 반, 그리고 담임 선생님을 불러 가로로 세우셨다. 우리는 여기저기 모여 웅성대고 있다가 한 명 한 명 호명하면, 자기 반을 찾아 담임 선생님 앞에 가서 세로로 죽 서야 했다. 이것이 우리 월포의 전통인 것은 4학년이 되고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1학년 2반이면, 2학년 2반, 3학년 2반 이런 식으로 똑 같은 반 친구들이랑 그대로 같이 올라 갔다.
그런데 4학년이 되니, 남녀 학생을 분리하고 같은 반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모르는 아이들과 한 반이 되어야 했다. 전학년을 모아놓고 운동장에서 일일이 반편성을 하는 모양은 장관이었고, 우리는 서로 어느 반 어느 담임한테 갈 건가 조마조마하며 호명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던 오숙자 선생님 반에 가고 싶어 기도까지 올리고 있었는데, 제일 무섭게 보이는 4학년 7반이 되어 버렸다. 새로 전근 오신 성낙주 선생님은 바짝 치켜 깎은 머리와 샤프하게 찟긴 눈으로 마치 귀순용사처럼 보여 무시무시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내 신세를 한탄했다.
수업 첫날, 우리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교탁 앞에 버티고 선 선생님을 슬금슬금 훔쳐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예의 그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으로 우리를 한 번 훑어 보시더니, 성적표 묶음을 뒤적 뒤적했다.
'첫날부터 뭐 하는 거지?'
아이들은 여전히 숨을 죽인 채 선생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갑자기 휙 돌아 서더니, 칠판에 이름을 빠른 필치로 적어나가셨다.
박정수, 오승자, 정혜남, 지희선!
'아니, 저게 뭐지? 왜 내 이름이 있는 거지?' 칠판에 적힌 내 이름을 보자마자, 예의 그 심장병이 도졌다. 두근 반 세근 반, 숨소리도 엇박자가 났다.
"에, 또- 이름 적힌 사람은 내일 회장 선거가 있으니 3분 연설 준비해 오도록!"
뭣이라? 연설? 아니, 일어나서 책도 못 읽는 나한테 연설이라고? 금방,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숨이 가빠온다. 다행히 첫날이라, 반나절 수업만 끝내고 집으로 달려왔다.
"엄마! 엄마!! 큰일 났어요! 내일 3분 연설 준비해 오래요 !!!"
난, 숨가쁜 목소리로 어머님께 긴급상황을 전했다. 어머닌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차분하게 이르신다.
"3분도 필요 없다. 1분이면 된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해!"
저녁 식사 후, 어머니는 본격적인 훈련으로 들어 가셨다. 이 기회에 '또디기' 딸 하나 인간 만들어 보자고 작심하신 모양이다. 어머니의 '비법'은 간단명료했다.
"희선아! 나가서 정중하게 45도로 인사하고, <앞으로 잘 해 보겠습니다!> 하고 또박또박하게 말해. 그런 뒤에, 다시 45도로 인사하고 들어오면 된다. 알았제? 자, 이제 엄마 앞에서 연습 한 번 해 보자!"
뭐, 나를 시켜 달라고? 될까 봐 사색이 되어온 나를? 정말 까무러칠 일이다. 하지만, 엄마의 명령은 어린 나에겐 '신탁'만큼이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다. 교육열이 높으신만큼 우리에겐 아주 엄격하셨다.
그날 밤, 단발머리 어린 가시내는 엄마가 시키는 지시에 따라 열 번도 더 넘게 연습했던 것같다. 설마 되겠나 하는 안심 반,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 반을 안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학교로 가니 분위기가 심상찮다. 벌써, 오내과, 정내과 딸 두 집에선 학교 비품을 사 들인다 뭐다 하면서 물품 공세를 시작하고 있었다. 방송국장 딸이었던 박정수는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재깍재깍,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왔다. 숨이 할딱댄다. 가슴을 꼭꼭 눌러도 진정 기미가 없다. 앞의 애들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어머님의 '신탁'만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차례가 되어, 또박또박 걸어 나갔다. 절대로 빨리 걷지 말고, 등을 곧추 세우고 자신 만만한 걸음으로 나가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난, 처음부터 끝까지 어머니가 연습시켜주신 그대로 '명 받들어' 했다.
와- 하는 아이들의 함성이 터지고 내가 회장으로 당선됐다. 가문의 영광인지, 운명의 '호작질'인지 '또디기' 딸이 회장으로 당선되는 변이 일어났다. 부회장은 정내과 딸인 정혜남, 반장에는 오내과 딸 오승자, 부급장엔 방송국장 딸 박정수가 됐다.
뽑아놓고 보니, 회장이 완전 또디기다. 책읽는 것조차 더듬으니, 선생님도 '아차!'하는 눈치였다. 그때부터 또 담임 선생님의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회의 진행에서부터, 자습 시간 문제 풀이 지도, 심지어 레크레이션 진행까지 가르치셨다. 장장, 3개월.
미꾸라지가 용 됐다. 전교 회의에 가서도 반 명예를 걸고 또박또박 보고를 하게 되었다. 성격이 바뀌고 행동도 바뀌었다. 자신감이 붙었다. 그러나 한껏 부풀어 오르던 꽃봉오리는 거기까지였다.
다음 해, 부산으로 전학을 오자 나는 다시 움추려들었다. 예의 그 소심증이 다시 발병을 했다. 홈시크로 밤이면 밤마다 달을 보고 우는 갑순이가 되었다.
4학년 이후로 세월따라 나도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 남들이 믿거나 말거나, 마이크만 잡으면 후들대는 병. 쉬이 고쳐지지도 않건만 '대통령'이 적격이라니. 그래, 나도 막판 망쪼가 들더라도 순실이 데리고 대통령 한 번 해 봐?
지희선 대통령!!! 글을 읽노라니 저도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많은 장면이 떠올라 많이 웃었습니다.
마이크 후들병이 믿어지지 않지만 순실이만 제대로 만난다면 한번쯤...
엄마의 내공이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