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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2019 과천 대공원 동창 이태영 작품


이 아침에 <한 얼굴의 두 미소> - 김영교


 여러 해 전이다. 밝은 세상은 나를 그냥 두지 않았다. 바삐 움직이게 해 쉼을 앗아갔다. 잎만 무성한 삶이었다. 삶의 밤바다에서 드디어 난파되었다. 암이었다. 여러 날이 겹쳐 지나면서 몸은 피폐 되어갔다. 바람이 불었다. 괘도수정이 생명쪽으로 불가피했던 시절, 독대의 분위기를 심화시켜 의미 있는 다가감은 기회였다. 나만의 몫이었다.


  캄캄한 밤이면 동거하는 고통이 영락없이 잠을 깨워 혼자 날을 밝힌 때가 많았다. 내가 만난 여러 밤은 깊숙한 적요 그 한가운데 존재하고 있어 고맙게도 별도의  편안함을 체험하게 해 주었다. 밤을 사랑하게 되면서 눈이 떠졌다. 어두움 한복판에는 정작 어두움은 비어있었다. 점점 눈은 어두움에 익숙해지고 어두움 안에서는 어두움 한 색깔밖에 없기 때문에 마음이 가서 닿는 곳이 이미 하늘이었다.

  

어두움에는 껴안음이 있어 좋다. 쌓인 긴장을 벗겨주면서 편안한 포대기가 되기도 한다. 또 어두움에는 평등함이 있어 모든 존재의 높이, 깊이, 넓이의 차이를 넘어 어두움 하나로 묶어 공평하게도 해 준다. 우주의 광활한 품속 하나에 평등하게 안기게 해줘서 무척 느긋해지곤 했다. 이럴 때 눈을 감는 행위는 가시의 세계 반대편 어두움으로 직행이다. 거기에도 범할 수 없는 편안함이 있다. 어두움이 빛의 실체를 가장 확실하게 나타내 주는 배경이 되는 것, 그것을 인정하고부터 그 가치를 사랑하게 되었다. 생명 메카니즘이었다. 하루가 밤과 낮, 인생은 생과 멸의 두 바퀴라면 같은 분량과 같은 길이, 잠자는 밤과 활동하는 낮, 전체를 껴안고 보면 온통 소중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고마운 것들로 넘실댄다는 인식이었다.

 

 그늘은 어두움 쪽에 속하지만 광명한 세계가 있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가. 진땀이 나 괴로울 정도로 인생의 날씨가 몹시 더울 때 체온은 방향제시를 해 그늘로 가도록 한다. 어머니의 각막이식- 시력 장애를 옆에서 목격했을 때 분명 어두움이었다. 눈이란 인식의 창을 통하여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에의 상실, 바로 절대 불편이었다. 신앙심으로 잘 감내, 그 장한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문득 어두움은 감사 콩같다란 생각이 든다. 어두운 곳에서 물을 주면 <콩나물>이 되고 햇빛을 쏘여주면 <콩 나무>가 되듯이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 둘 다 생명이기에 소중한 존재가치가 있다. 콩이 콩나물이나 콩나무가 되었다고 뽐내지 않고 기죽지도 않는다. 감사의 척도는 주어진 생명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제 몫을 최선으로 여기는 것, 콩은 스승이었다.

 

 앞서가는 요즈음 같은 스피드 세상, 스마트 정보망 시대에 나는 밍그적거리는 어두운 사람이 다. 병도 어두움도 삶이다. 꼭 일어나야 하는 이유, 꼭 일어날 수밖에 없는 관계나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됐다. 환하고 밝은 대낮은 캄캄하고 추운 밤이 있을 때만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이치를 이제는 국외자의 눈으로 바라본다. 쉼이 있는 어두운 밤은 역동적인 밝은 낮의 다른 얼굴이다. 미소 짓는 때가 다를 뿐이다. 춥고 어두운 밤을 지나온 과일의 단맛을 나는 고맙게 여긴다. 나의 겨울밤은 지나가고 있다.

   10/1/2019. 월 중앙일보 이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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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태영의 월미도 갈매기 20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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