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요, 영옥씨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혼혈인가 했을 정도로 서구적인 인상이었다. 은빛의 매우 짧은 커트머리가 잘 어울리는 작은 얼굴이 예뻤다. 그녀가 혼자 배낭여행한 경험담을 들으며 같이 산행할 때는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등과 가슴에 배낭 하나씩을 메고 유스호스텔의 벙크베드에서 자며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한 싱싱한 이야기는 내가 꿈속에서나 그려왔던 바로 그 풍경 아니던가. 갈라파고스, 파타고니아 등 나의 버킷리스트 목록을 벌써 다녀오고, 또 다른 목적지를 계획하여 공부하는 그녀가 존경스럽고 멋져보였다. ‘그녀를 산악회에서 만난 것이 무슨 계시가 아닐까’, 하며 ‘나도 이제 꿈을 실현에 옮길 때가 되었지.’ 했다. 60대 초반이지만 나이 들었다는 느낌을 전혀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열정과 도전정신이 많았다. 한국에서 미술 교사였다는 그녀의 패션 감각은 뛰어나서 평범한 등산복을 입어도 막 카탈로그에서 모델이 걸어 나오는 듯했다.
그녀와 나는 산악회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자라 상대적으로 걸음속도가 느렸다. 뒤에서 따라오는 잘 걷는 이들을 먼저 보내고 나면 저절로 후미 담당이 되었다. 우리의 늦은 발걸음이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때, 여유롭게 얘기하며 경치를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운동과는 담 쌓고 살아온 터라, 무리하지 말고 꾸준히, 천천히 실력을 쌓자는 생각이었다. ‘정상을 못가면 어때, 내가 간곳이 나만의 정상이지.’하며 느긋하게 마음먹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녀는 길고 힘든 산행 일정이 잡힐 때면 정상을 칠 요량으로 그룹보다 한 시간 먼저 출발하곤 했다. 정상에서 우리 일행을 만나 같이 하산하는 것이다. 나에게도 같이 가자고 권했지만, 이른 새벽 따뜻한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찍 일어나기는 항상 힘들었다.
그날은 올해의 마지막 눈 산행을 하자며 산행지를 마운트 볼디로 바꾸었다. 산악회원 차들이 꼬불꼬불한 마운트볼디로드로 들어섰을 때, 경찰차 여러 대가 길을 막고 있었다. 계곡으로 차 한 대가 굴러 떨어졌는데, 세 명이 사망하여 응급차와 소방차가 오고 헬기도 떴다. 공교롭게 영옥씨는 한 시간 일찍 출발했고, 우리는 교통사고 때문에 마운트 볼디를 갈수 없었다. 산행지를 다른 곳으로 변경한 후 전화메세지로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하였다. 그녀가 여러 차례 와봤으니 산행을 잘 하겠지 기대했나보다.
조난은 히말라야 등반 같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나 일어나는 사고라고 막연히 믿었다. 나중에 영옥씨의 조난과 구조소식을 들었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향감각이 남달리 둔한 나도 트래일을 놓쳐 엉뚱한 방향으로 걷다가 길을 잃었던 경험이 있으나 곧 일행을 만나 무사히 돌아오곤 하지 않았던가. 일주일 후 산행 집합장소에서 만난 그녀는 평소의 활기찬 모습은 없고 심신이 지쳐보였다. 구조에 동참한 산악회에 고마움을 전하러 일부러 나온 것이다.
교통사고로 입산이 통제된 사정을 모르는 그녀가 우리 일행은커녕 다른 등산객도 만나지 못하자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하산하다가 방향을 잘 못 접어들었다고 했다. 가족과 산악회원들에게 여러 통의 전화를 했으나 깊은 산 중이라 불통되어 메시지만 남겼다고 했다. 체력소모를 줄이기 위해 산 중에서 밤을 지새우기로 하고 적당한 장소를 찾아 쉬며 가져간 도시락을 세 번에 나누어 먹었다고. 기적적으로 보이스 메일을 들은 산악회 총무가 경찰에 신고하고 연락된 회원들은 다시 볼디산으로 달려갔다.
헬기가 뜨고 수색이 시작되었다. 새벽 세시가 돼서야 영옥씨의 위치를 찾았다. 무전 연락이 되자 그녀는 ‘이제 살았구나.’하며 마지막 남은 양갱 한 토막을 먹었단다. 헬기가 바로 눈앞에 있어도 빨리 그녀를 못 찾으니 다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미술교사 출신답게 평소 가지고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작은 스케치북을 보며 기다렸다고 했다. 자신의 위치를 알리려고 허둥거리다 밤에 골짜기로 떨어져 죽는 경우도 많다는데, 그녀의 차분한 위기대처능력이 그녀를 살렸다. 구조대는 모두 민간인 자원봉사자들로 삼천불 상당의 구조장비도 자비로 마련하고, 구조 훈련과 봉사를 위해 일부러 산 근처로 이사한 대원도 많다니 놀랍고도 고마운 일이다.
위급한 중에 평정심을 잃지 않고 구조대의 지시를 잘 따라 무사히 돌아온 영옥씨가 자랑스럽다. 무전기와 헤드램프가 있어서 깜깜한 밤중에도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 있었다. 방한모자와 여벌의 옷이 있어 저체온증도 피할 수 있었다. 나는 초보자라 체력이 아직 약하다는 핑계로 가볍게만 배낭을 꾸려왔다. 하루 산행할 때 무전기는 챙기지만 헤드램프는 생략하고, 날씨에 따라 여벌의 옷이나 장갑, 양말 따위를 가감했다. 주머니칼, 성냥, 여분의 건전지, 거울, 나침반, 호루라기, 방풍방수 옷 등 미비한 것들을 배낭에 넣으니 꽤 무겁다.
돌이켜보니 항상 충분한 준비 없이 삶을 살아왔다. 학창시절 시험공부는 매번 당일치기 벼락공부였다. 갑작스레 떠나온 이민생활의 시행착오도 많다. 마지막까지 기다려야 능률이 더 오르니까, 닥치면 다 할 수 있어, 어쭙잖은 자신감으로 살얼음판을 걷듯이 살았다.
깜깜한 깊은 산속에서 홀로 헤매며 얼마나 춥고 무서웠을까. 그것도 모르고 집에 돌아와 편히 쉬었으니 미안하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꼭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영옥씨를 지켰겠지. 견디고 무사히 살아 돌아와 주었으니 고맙다. 매사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함을 일깨워주었다. 평정심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주었다.
‘고마워요, 영옥씨. 얼른 회복해서 우리 오래도록 즐겁게 산행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