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은 가정의 달, 청소년들을 생각하며.
양상훈
오월은 만물이 약동하는 푸른 계절이다. 무성한 나무, 싱싱한 풀잎들에 용솟음치는 자연의 생명력. 온 생물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활기에 차있다. 이 푸른 오월의 계절에 젊음의 대 행렬이 곳곳에 쏟아진다. 어느 모임에든 볼 수 있는 늠름한 우리청소년 모습이다 .이 활기찬 신록의 계절에 젊은이들의 이러한 모습을 볼 때 마다 가슴 뿌듯한 감격과 흐뭇한 감회를 느낀다.
우리의 선각자 도산은 “낙망(落望)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라고 갈파하면서 젊은이들이 옳게 자라고 있는가. 바로 키우고 있는가를 늘 강조 했었다.
젊은이의 눈동자에는 맑은 정기가 빛나고, 가슴에는 양심의 등불이 켜지고, 머릿속 에는 냉철한 이성이 깃들고 ,발걸음에 힘찬 기백이 충만하다면 이 땅에 상륙한 이민세대는 밝은 희망이 있는 민족이라 보지 않는가.
어떤 각오에서든 이 대륙을 선택한 이민세대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과 시련의 언덕에서 눈물과 땀으로 대지를 일궈가고 있다. 비록 희생의 제물로 삶의 길목에서 서 있다하더라도 이 땅에 영근 사랑을 심어야 할 사명감이 있다.
이민세대들에게 왜 이 땅에 왔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자녀교육 때문에 왔다고 한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본질이 자녀교육의 목적일 수 도 있다. 분명한 것은 자녀들을 보다 좋은 환경에 성장시켜 더 훌륭한 교육시설에 양질의 교육을 받아 더 많은 기회의 나라에 그 들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소망은 누구나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망은 아무리 기름진 옥토에 좋은 꿈나무를 옮겨 심었다하더라도 저절로 자라지 않는 법이다.
사랑과 정성으로 꿈나무를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흙을 북돋우고 물을 주며 김을 매고 거름을 주며 가지를 치어야 무성한 나무로 자라게 된다. 그리하여 미 대륙의 방방곡곡에 푸른 초원으로 덮어 한민족의 저력이 자손대대로 뻗어나가도록, 이 땅의 주인 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이 바로 이민세대의 몫이다.
우리들 주변에는 자녀교육을 위해 이민을 왔으나, 이민을 왔기 때문에 아이를 망쳐버렸다는 얘기를 듣는 경우가 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이민역사가 길어지고 이민뿌리도 정착됨에 따라 청소년들의 비행과 범죄도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이민세대에 모두의 아픔이요 고통이며 책임이다.
경제적으로 성공을 하였다하더라도 자녀교육에 실패한다면 아메리칸드림도 허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부모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성은 세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대단하다. 낮선 대륙에 상륙하자마자 고된 이민생활에 부딪히면서도 자식교육에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이름다운 자연 환경,풍요로운 물질문화의 홍수에 아이들에게는 지상낙원이라 할 수 있지만, 갑자기 울타리 없는 자유 분망한 환경에 정상 레일을 벗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기도 한다. 대부분 이민세대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미풍양속의 토양을 이 땅에 적절히 혼합시켜 자연스럽게 이질문화를 소화하면서 아이덴티를 유지하는 길을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80넌대 초 ,난 서울에서 금융기관 뉴욕주재원 발령에 따라, 우리가족이 동반 이주하게 되어 미국생활이 시작하게 되었다. 이전에 단신으로 미국에서 유학생활 경험이 있었지만, 가족전원이 이주하게 된 경우는 처음이었다. 중1딸과 초등학교 1학년 5학년 두 아들과 함께 뉴욕에서 미국생활이 시작되면서 직장근무보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더 크고 걱정이 되었다.
그 당시 사택 거주주변에 동료직원들과 한인가족이 적지 않았다. 모두가 자녀교육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과 노력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어느 가정은 자녀들에게 영어공부만을 강요하는 부모도 있었다. 집에서 한국어 대신에 영어만을 사용케 하고 밖에서 한국친구보다 영어권친구와 어울리도록 유도하며 그들을 자주 초대까지 하는 열성은 어떤 의도이든 이해하지 못했었다.
난 이 방법보다 다르게 택하기로 했다.. 집에서는 모두 한국어를 꼭 사용하고 밖에서는 어느 종족이든 어울리며 영어를 사용토록 허용했다
.특히 영어, 한국어 양쪽언어가 서투른 막내에게는 많은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쉽고 재미있는 한글만화 그림책과 “어린이 전통예절”이란 책이 공수되어왔었다.
삼남매를 위해 뉴욕총영사관에서 초등학교 전 학년 교과서를 얻어 여가 시간에 자유롭게 익숙토록 권하였다. 아이들이 예상보다 일찍이 E.S.L코스를 패스하고 정상수업에 들어갈 때 쯤 모두 일기를 쓰도록 지도했다. 일기를 쓰는 목적과 좋은 점을 역설하면서, 문장이 틀리고 문법이 맞지 않거나 스팰링이 틀려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쓰도록 격려하였다. 다음 한 달이 지나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한글 일기를 쓰도록 지시했다. 나는 아무리 바쁘고 직장에서 늦게 귀가하여도 아이들의 일기장만큼은 철저히 체크했다. 틀린 문장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정정해주고 마지막에 칭찬과 격려의 코멘트를 잊지 않았다.
아이들이 일기를 꾸준히 쓰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의외의 장점을 발견하였다
아이들이 1년 이상을 경과하자 학력이 상위권에 들어가면서 학업성취도가 높아지고 뿌리가 내리는 시기였다. 큰 아들은 과학 분야에 소질이 있어 각종 과학경시대회에 입상을 한바 있었다. 둘째는 중2년 때에 존스홉킨스대학 영재캠프CTY(Center for Talanted Youth)선발시험에 전교에서 유일하게 합격되어 가족에게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 후 고교에 입학하자 하학 한 후에 인근병원에 자원봉사를 하는 등 일찍이 의학도의 꿈을 품고 있었다.
주재원생활이 한정된 기간에 어려운 생활이기는 하나 직원들 간, 국민들 간에서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였으나 여행을 많이 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가족도 주말이면 미동부 인근지역을 여행 하곤 했다. 가족과 함께 정기휴가 때에 미동북부와 카나다동북부 명소를 여행한 추억은 잊을 수 없다. 캠프책자 번호를 따라 캠핑사이트를 찾아 가면서 탠트안에 즐거워하던 아이들의 모습은 집에서 경험하지 못한 분위기에 가족사랑의 띠를 단단하게 묶어 주었다고 할까.
세월은 유유히 흐르는 허드슨 강물처럼 빨리 흘려갔다. 그 동안 아이들이 미국생활에 잘 적응하여 학업성적이 상위권에 탄탄히 정착하려 할 때에 나는 귀국발령을 받았다. 아이들이 미국에 남아 학업을 계속하여 꿈을 펼쳐보겠다는 야망이 부모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학기말 정리와 서울에 전학절차 문제로 간단한 이삿짐과 함께 나 홀로 먼저 귀국했다.
이산가족으로서 서울과 미대륙간에 줄다리기를 하며 이른바 기러기아빠의 신세로 전환한 것이다.
미동부 뉴욕권에서 삼남매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올바르게 성장하여 모두 최고학부를 마치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성인으로서 딸은 교직자로, 큰 아들은 IT기업체 연구원, 막내는 의사로서 얼마간 대학병원에 근무하다가 독립된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본인은 교육전문가가 아니다. 다만 가정 내에서 자녀들을 양육하는 과정에 뒷바라지 하면서 경험을 중심으로 교육에 관한 노하우를 많이 습득하게 되었다. 바람직한 자녀교육은 사랑과 엄한 훈육울 병행하여야하며, “엄마 아빠 바로 살면 아들 딸 바로 자란다” 는 교훈은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한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의 청년교육여하에 달려있다고 늘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