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단상
김석연
어렸을 때 사주를 보니 역마살이 끼었단다. 그래 그런지 싸다니기를 유별나게 좋아 한다. 1년에 1만 마일 Drive하는게 평균이라는데 나는 매년 2만 마일 이상을 달렸으니 역마살이 단단이 든 모양이다. 어디 명산 유곡이 있다면 가지 못해 안달이 나고 좀이 쑤셔 못견딘다.
흔히들 여행 하면 고대 도시의 문화 유산이나 박물관을 연상하는데 나는 사람의 손으로 꾸며진 것은 싫어 한다.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처녀지,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그대로의 자연 풍광을 좋아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캠핑 여행을 선호하며 그것을 멋으로 알고 있다. 돈이 많다면야 고급 호텔에서 최고의 서비스를 받는 것이 나쁠리야 없겠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것이 캠핑 여행을 택한 솔직한 심정이다.
진정한 여행은 풍류나 해학이 함께 어울려야 제 맛이 난다. 맑은 물이 흐르는 들꽃이 피어난 곳이면 아주 흡족하다. 사자 성어로 말하면 수류화개(水流花開)면 금상 첨화이다. 우선 마음이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고 시정의 찌든 때가 말끔히 씻겨져 신선이 된다. 산과 물, 나무와 숲, 상큼한 풀 내음과 시원한 바람, 이런 것들이 나의 더러운 것들을 맑끔히 씻어 준다. 자연의 상큼한 맛이 내 삶의 깊이를 더하게 하고 사려 깊게 하는게 여행이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처럼 풍류를 즐기는 방랑인이게 하는 여행을 나는 좋아 한다. 우리의 선조들은 길을 떠날 땐 개나리 봇짐 속에 으레 퓽류낫(時刀)을 넣고 다녔다. 경치 좋은 곳을 만나 시흥이 돋아 나면 가던 길을 멈추고 퓽류낫으로 나무를 깍아 그곳에 시 한 수를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아! 얼마나 멋진가. 전 세계 어느나라에도 이렇게 멋진 풍류는 없을 것 같다. 길을 떠난이가 지필묵이 있겠는가. 숯을 갈고 먹물을 만들고 갈대를 꺽어 갈붓을 만들어 계곡이나 수석 위에 시를 남겼단다. 바람에 날려가던 빗물에 씻겨가던 마음 내키는 대로 따르면 그뿐이다. 그도 아니면 친구집 벽면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기방에 들면 기생 치마폭에 사군자를 치기도 하는 풍류의 멋이었다. 내가 원하는 여행은 이런 멋이 있는 풍류를 원함이다.
여행을 떠날 땐 되도록이면 지저분한 것은 가져가지 말고 홀가분하게 떠나야 한다. 래디오, 카메라, 쌍안경, 캠코더 같은 것은 참 여행을 방해 하는 공해가 될 뿐이다. 산에 오를 때 짚을 지팽이 하나면 족하다. 그래야 자연에 푹 잠겨 심취할 수 있다.
빈손으로 떠나야 다 비우고, 올 곧은 마음으로 돌아 올 수 있다. 수류화개 면 청풍명월(淸風明月)이 될 수 있다. 청풍명월은 이조 성종 때 유청풍이 청풍정을, 박명월은 명월전을 짓고 거기서 매월 풍자극을 행하며 조정과 세태를 비판한 것이 후세에 이런 풍을 청풍명월이라 칭하게 됐단다. 수류화개에 들면 억울함도 분노도 청풍명월도 확 풀려버려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다.
감히 미래를 넘볼 나이도 아니고 몸은 점점 비실비실해지기만 하는데 마음만은 저 푸른 하늘을 닮아 간다. 헛된 꿈인 것임을 알면서도 파랑새를 잡으려 한다. 이럴 때 나를 잠재워 주는게 여행이다. 누군가 내 시린 등짝을 긁어주길 비랄 때 자연에 들면 가려운 등짝이 시원해진다.
삶이 깊어 갈수록 마음의 공허는 더 커진다. 마무리를 잘 해야 할텐데. 석양에 지는 해처럼 품위를 지키고 싶다. 이러한 사유를 어루만져 주고 싸매 주는게 심산 유곡의 여행이다. 오늘도 사랑하며 모두를 사랑하며 연륜에 걸맞게 미소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길을 떠나 맑은 물이 흐르고 들꽃이 한 송이라도 피어 있는 곳에 가면 엄마의 품처럼 포근해 진다.
결국 산다는 건 떠도는 것이다. 여행이던 밥벌이를 하던 가고 오는 게 사는 것이요, 죽는 다는 건 가고 오는 걸 쉬는 것이다.
삶이 여행이라 느껴집니다. 그 오고 감이 멈추는 것이 삶의 끝이 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