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way Life/ 김석연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길(道)이라고 한다. 성직(聖職), 도를 찾고 도에 이르는 길을 찾는 직업이 아닌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도는 한번도 접해본 기억이 없고 도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하차한 것 같다. 도에 이르지 못했다면 부끄러운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닌가. 지나온 과거가 가치가 있었다든가 보람이었다고 말할 수 없으니 실패한 인생인 듯 하다.


세월이 간다고들 하지만 가는 건 세월이 아니고 나 뿐인 것 같다. 해도 달도 모두가 그 자리에 있는데 나만 가면서 세월을 탓한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틀리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팔뚝이며 장단지의 근육이 날마다 탄력을 잃어 흐물흐물 해지고 번데기를 닮아가면서 흰서리만 늘어간다. 이렇게 흉해가면서 흐른 만큼 진리를 터득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세진만 두껍게 쌓여 몰골이 흉물스럽게 변한다. 뜰앞의 나무들은 햇살과 바람만 먹고도 해마다 듬실해 가는데.

은퇴하면 죽는 날까지 유유자적하며 자유(自遊)코자 했는데 실컷 게으름 한번 피워보지 못하고 지금도 동동거린다. 지옥은 누가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젖어드는 곳이라더니 지금 내가 판 웅덩이에 내가 빠진 거다.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을 당하고 있는 거다.


누구나 행복하길 바란다. 누구나 삶은 행복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담근성(핑계) 때문에 행복을 연출하지 못하고 있다. 불행하다는 것이 어디 시절을 잘못 만났고 불운한 환경 때문 만일까. 행복을 연출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누구는 얼마를 벌고 누구는 무슨 차를 몰고, 그런 데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건 아주 멍청한 짓이다. 막걸리 한 잔에 김치조각 하나로도 행복을 일궈갈 수 있다. 토관 속의 거지 부자(父子)가 앞집에 불난 걸 보며 자기는 불날 걱정이 없으니 행복했다지 않은가.


삶은 Outsider가 아니다. 주연이어야 한다. 각본과 연출과 연기의 주체이어야 한다. 글 못쓰는 자가 붓을 탓하듯 아담처럼 남의 탓이요만 외친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주체노릇을 제대로 못하면 불행 만이 따를 뿐이다.

나는 각본, 연출, 연기의 총체적인 낙제점이다. 우선 각본 자체부터 틀려버렸다. 삶을 좀더 여유있고 윤택하게 느긋하게 꾸몄어야 하는 건데 내 각본에는 그럴 틈새가 없었다. 행복하려면 성공을 해야 하고 성공을 위해선 뛰어야 한다는 Freeway Life의 각본을 ?으며 이제 그 Freeway에서  Exit을 하고보니 이게 종착역이 되어버린 것 같다.


고속도로에서는 그냥 달리기만 해야 한다. 중간에 쉴 수가 없다. 놀거나 즐겨서는 더욱 더 안된다. 일단 들어서면 끝장날 때까지 달리기만 해야 한다. 달리기 외에 소중한 시간들을 가질 수 없는 게 고속도로 삶이다. 내 각본이 아니더라도 스피드 세상, 디지탈 세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후리웨이에서 내리기만 하면 그땐 쉴 수도 있고 즐길 수도 있고 마음대로 뒹굴며 늦장을 부리며 행복하리라 기대했건만 내려보니 더욱 황량하고 공허하기만 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데 각본, 연출, 연기, 모두가 서툴렀으니 하늘이 도울 리가 있나. 총쏘는 법을 배우지도 않고 전쟁터에 나간 꼴이었다. 행복의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려는 무례를 범한 것이다.

남들처럼 살면 10년은 더 살텐데, 이 기니긴 세월을 어이 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