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마중 / 한이나

 

그리운 사람이 돌아오는 길을 앞서 나가 맞이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어릴 적엔 헤어져 살았던 엄마가 나를 찾아올 때 시골 역으로 마중 나가며 설레었던 마음, 나이가 들어선 성인이 된 딸아이를 맞으러 기쁜 마음으로 공항에 나갔던 일을 기억한다. 하지만 먼 곳에서 돌아오는 친구를 맞으러 900마일이나 되는 곳까지 비행기로 날아가 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친구는 어머니를 방문하기 위해 샬럿 노스캐롤라이나 (Charlotte, North Carolina)를 혼자 여행하고 있었다. 방문을 마치고 닷새에 걸쳐 자신이 사는 투산 애리조나 (Arizona, Tucson)까지 운전해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힘든 여정이다. 그 여정의 반쯤이 되는 샌안토니오 텍사스 (San Antonio, Texas)까지 가서 이틀 정도 함께 운전하며 말동무가 되어 준다면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비행기 예약을 서둘렀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 샌안토니오 (San Antonio)는 짙푸른 나무로 둘러싸인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이는 도시였다. 낯선 도시에서 잠시 헤어졌던 친구와의 만남은 내게 신선한 기쁨을 주었다. 거리를 둘러볼 여지도 없이 날이 어두워지고 다음 날 이른 출발을 위해 잠을 청했다. 춥고 바람마저 세차게 불어대는 다음날 새벽 계획했던 대로 I- 10W 하이웨이를 타고 투산을 향해 긴 여행을 시작했다. 샌안토니오에서 투산까지는 870마일 정도 되는 거리이고 차로는 1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리는 이틀간의 여정을 계획했다. I- 10 하이웨이는 무려 플로리다 (Florida), 미시시피 (Mississippi), 알라배마 (Alabama), 루이지애나 (Louisiana), 텍사스 (Texas), 뉴멕시코 (New Mexico), 애리조나 (Arizona), 캘리포니아 (Californis) 8개 주를 거치는 긴 하이웨이다. 샌 안토니오를 떠나 I- 10W 하이웨이를 타고 엘 파소 텍사스 (El Paso, Texas)를 지나 라스크루시스 뉴멕시코 (Las Cruces, New Mexico)를 통과해 우리가 사는 투산에 도착할 것이다. 텍사스에서 애리조나로 운전하는 일은 처음이었지만 I- 10 하이웨이는 엘에이에 살고 있을 때 투산까지 몇 번 운전하며 여행한 일이 있어서 이름 자체론 이미 친숙해 있었다. 이제 텍사스를 떠나서 투산 애리조나에 도착하게 되면 길고 긴 I-10 하이웨이에 속해있는 8개 주중 반이 되는 4개 주를 거쳐보는 셈이 된다. 언젠가 이런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I-10 하이웨이의 끝이 되는 잭슨빌 플로리다 (Jacksonville, Florida)까지 시도해 보는 싶은 욕심도 생겼다.

몇 번의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지만 차로 운전하는 여행은 언제나 이야기가 있다. 작은 마을과 도시를 거치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곳에서 숨 쉬고 자라는 자연을 보았다. 언젠가 동이 트기도 전 인형의 집 같은 조그만 커피숍에 들렀을 때 일이다. 태풍으로 바다에 나가지 못한 어부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은 지금도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남아 있다. 지난 크리스마스 무렵 퍼시픽 하이웨이를 지나면서 어느 시골 조그만 베이커리에 들렀던 생각이 난다. 오븐에서 방금 구워낸 커다란 통밀 스콘을 건네주며 환하게 아침 인사를 하던 긴 수염의 할아버지는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낯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나는 여행을 하면서 간단한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그러다 보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들만이 알고 있는 아름다운 곳을 전해 듣고 돌아볼 소중한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그런 곳에 들를 때마다, 구석 한 모퉁이에 쌓아 놓은 지방신문과 안내 책자를 집어 들고 읽어 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곳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여행하면서 터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둠을 뚫고 달리기 시작한 I- 10W는 눈발이 날리고 기온은 화씨 24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겨울 날씨였다. 텍사스의 조그만 도시 벤 혼 (Van Horn)을 지나면서 커피와 페이스트리를 파는 조그만 베이커리를 찾았다. 밖은 아직도 눈발이 날리고 매섭게 쌀쌀했다. 인디언 원주민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 이름뿐인 베이커리였다. 따끈한 커피와 방금 구워낸 달콤한 머핀이 그리웠던 내게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진 미지근한 커피 또한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곳에서 다음 큰 도시 엘 파소까지는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불평할 여지가 없었다.

엘 파소 텍사스는 인구 백만을 겨우 넘어선 투산보다는 조금 더 큰 도시였다. 엘 파소를 지나면서 바로 옆으로 멕시코 국경이 보였다. 국경 벽과 바로 이웃해 있는 멕시코 영역인 와레즈 (Juarez) 시가 마치 한 도시처럼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엘 파소도 와레즈도 모두 잘 정돈된 깨끗한 도시 같아 보였지만 마약과 무서운 범죄가 우글거리고 인신매매가 성행하는 무서운 도시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에 보았던 끔찍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배경 도시가 바로 와레즈였던 것으로 기억되었다. 아무리 위험하고 무서운 도시라 해도 커피가 그리워지면 어찌할 수 없다. 스타벅스가 눈에 띄어 엘 파소 한곳에 차를 세웠다. 그곳에서 진한 블랙커피와 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스콘을 한 조각 입안에 넣는 순간 무서운 것도 부러울 것도 없었다. 카페인과 단것이 함께 작용한 덕으로 기분은 한껏 고조되었다. 마침내 뉴멕시코의 환영 표지판을 지나 라스 크루시스로 향했다. 이젠 날도 밝아지고 기온도 40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40 도가 따사로운 한 봄의 기온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 또한 여행이 아니면 느껴볼 수 없는 체험이다. 라스 크루시스에서 개스를 채우고 내가 운전을 맡았다. 이젠 나도 여행에 한몫하게 되었다는 뿌듯함과 주고받는 정겨운 이야기로 피로를 잊었다. 이렇게 간다면 이틀간 계획했던 여행을 하루로 단축하고 그리운 집에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도 생겼다.

라스 크루시스에서 투산까지의 여행은 순조로웠다. 뉴멕시코를 통과해 눈앞에 펼쳐지는 애리조나는 아름답고 평온했다. 사막이지만 잘 정돈되어 있었고 맞아주는 자연도 푸르고 평안해 보였다. 이곳이 바로 내가 웃고 울며 사랑하는 곳이라는 생각도 여행하면서 터득하게 되었다.

여행은 언제나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나 고도의 문명의 혜택을 등지는 여행일수록 그렇다. 비행기보다는 차로, 차보다는 자전거로, 자전거보다는 걸어서 하는 여행일수록 이야기는 많아진다. 양적인 것뿐만이 아니고 질적으로도 그렇다. 여행할 때는 이야기의 내용에 진솔한 마음이 더해진다. 13시간이 넘는 긴 마중의 일정을 마치고 현관문을 열었다. 하루 만에 돌아온 집인데 마치 오랜만에 만난 듯 반갑고 따뜻했다.

 

 

알만도 이야기/ 한이나

 

몇 해 전 추수감사절 때 오래전 페루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이웃 알만도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의 아내가 페루를 방문 중이어서 외롭게 혼자 연말을 보내게 되어서였다. 마켓에서 커다란 터키를 사서 온통 몸단장을 시키고 설레는 마음으로 오븐을 예열하려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오븐은 내 맘 같지 않게 빨리 달아오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터라 그만 자신의 역할을 잊은듯했다. 터키 대신 냉장고에 남아있는 재료를 모아 스파게티를 식탁에 올리고 알만도를 맞이했다. 추수감사절에 스파게티도 감사라는 농담 섞인 인사를 건네면서 만찬이 시작되었다. 알만도는 70대 중반쯤 돼 보이는 키가 작달막하고 키에 비해 커다란 얼굴은 덥수룩한 수염으로 반쯤 덥혀 있었다. 얼굴에 걸맞게 커다란 코에는 은테 안경이 살짝 걸쳐 있어 장난기를 더했다. 그래서인지 알만도를 처음 만나는 순간,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덕분에 내가 저지른 추수감사절 실수도 너그럽게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만도는 음식보다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아내 없이 혼자서 무던히도 말 상대가 그리웠던 것 같았다. 이야기는 주로 그가 믿고 있는 종교에 관한 것과 어떻게 아내를 만나 결혼하게 됐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아내를 만나 첫눈에 반해 바로 다음 날 청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평생을 함께 살 아내를 그렇게 빨리 결정하고 청혼을 했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알만도는 그렇게 아내를 만나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배우자를 만나 함께 해로하는 것은 자신의 결정이 아닌 신의 결정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후 어느 날 알만도의 아내가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암이 진전이 많이 된 상태라 예후가 좋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의 상태가 갑자기 악화돼서 응급실로 옮겨진 후 곧 세상을 떠났다. 가끔 화단에서 나무를 가꾸다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큰소리로 인사를 하던 알만도의 아내 노마를 생각했다. 노마는 자신의 남편만큼이나 체구가 풍만하고 땅딸막한 60대 중반의 여자였다.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나와 인사를 나누던 마음씨 좋은 노마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후 밤이면 환하게 불이 켜있던 알만도의 집에 한동안 불이 켜지지 않았다. 친구도 없이 오로지 두 부부만이 함께 고락을 나누며 살았던 알만도에게 아내를 잃어버린 것은 세상을 잃어버린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해 추수감사절 저녁에 알만도를 다시 혼자로 초대했다. 현관에 들어선 알만도는 눈에 띄게 수척해진 것 외에는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건강을 물었더니 요즘 체중을 줄이려고 식이요법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내가 떠난 후에도 자신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또 한편으로는 이제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고 돌봐줄 사람은 자신 외에는 없다는 절박감을 느낀 건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다. 역시 알만도는 그날 저녁을 먹으면서도 이야기가 많았다. 아내가 떠나고 죽음에 대한 주제로 자신의 종교와 관련지어 글을 쓰고 있다는 내용이 주가 되었다. 알만도의 죽음에 관한 믿음 역시 그의 종교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의 결혼관처럼 죽음 역시 그는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알만도의 아내가 떠난 후 새로운 해를 맞은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This is miracle!!”로 시작된 알만도가 남긴 전화 메시지는 듣는 순간부터 심하게 고조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에 푸에토리코에서 사는 여자를 소개받고 통화한 다음 날 약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제 곧 그 여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푸에토리코로 떠날 예정이라고도 했다. 단지 몇 장의 사진과 몇 번의 전화 통화로 그가 평생 함께 살 배우자를 결정한 것이다.

알만도의 결혼식 날 축하 전문을 보냈더니 새 아내와 찍은 결혼사진과 함께 “we are married now”라는 답신을 보내왔다. 그 후 새 아내와 함께 돌아온 알만도에게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의 집 앞을 지나칠 때면 관심 있게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인기척이 없었다. 대신 어느 날엔 집 앞에 산더미 같은 쓰레기가 놓여 있기도 하고 오랜 가구 조각도 보였다. 미루어 짐작해 아마도 대대적인 집안 정리를 하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알만도에게서 집이 정리되는 대로 우리를 초대하고 싶다며, “Maria is a real blessing to me. We have so much in common. It is like we have been married for years, no just three weeks.”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이제 그의 집 앞에는 쓰레기더미 대신 고운 화분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