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용진 선생이 5년째 진행하고 계시는 <샌디에고 문장교실>에 수필 강사로 초대를 받았다.
거리는 멀었지만(2시간 이상 운전), 평소의 친분도 있고 수필을 사랑하시는 분들과 강의보다는 담소를 나누고 싶어 응락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은퇴하신 분들로 공부를 많이 하신 지식층이라고 했다.
5년 동안 문장교실에 열심히 나오고 문집까지 낸 걸 보면 그 열정들이 대단한 것 같았다.
오후 5시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고, 6시부터 공부를 한다고 한다.
교통의 혼잡을 피하려고 일찌감치 출발을 했다. 도착은 오후 4시. 선생님 서재를 구경하고 함께 모임 장소로 이동을 했다.
살림을 알뜰히 살아오신 분들이라 그런지, 음식솜씨들이 보통이 아니었다.
강사로서의 '품위유지'도 잊은 채, 국물에 정성이 담뿍 든 씨래기국은 두 그릇이나 비웠다.
나는 확실히 국보다. 찌개는 거의 안 먹는데 국은 기본적으로 두 그릇을 비운다.
봄향내 가득한 달래와 고들빼기 초고추장 무침도 정말 맛있었다.
맛있게 먹은 대가로 "모두들 살림 10단이시네요."하고 덕담을 건넸더니 모두 파안대소하신다.
정용진 선생님 진행으로 공부가 시작되었다.
마이크 공포증은 있어도, 앉아서 하는 건 별로 떨리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어 가며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먼저 '나의 수필 쓰기'에 관해서 다분히 주관적인 이야기를 하고, 박문하의 <잃어버린 동화>와 최순우의 <바둑이와 나>를 감상하며 생활수필의 진맛을 보여드렸다. 수필은 '정의 문학'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날카로운 비평수필도 있지만,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이런 류의 부드러운 수필이 어울릴 것 같아서 내가 좋아하는 걸로 선택했었다.
끝으로 내 자작 수필 <엄마의 채마밭>을 쓰게 된 배경과 그 속에 나오는 엄마의 자작시 '나의 호박나무'를 소개했다.
글을 쓰면 사물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 더 나아가 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고 끝내는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문법이나 서툰 솜씨 때문에 인간 앞에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말도 당부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 앞에 부끄러워 하기 때문에 시작조차 못하는 걸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께도 누누히 부탁했던 말이다. 갈 날이 머잖았기에 더 절절히 부탁했는지도 모른다.
A형 소심증을 가진 어머니는 끝내 인간 앞의 부끄러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쓴 <나의 호박 나무> 라는 시 한 편만 딱 남기고 떠나셨다. 그야말로 여든 셋 인생 중에 남기고 간 유일한 작품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안 계신 지금, 내게는 그 어떤 유물보다도 이 시 한 편이 가장 값진 선물이다.
어머니의 마음과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었던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이승에서 보낸 마지막 계절을 함께 지낸 어머니의 호박나무. 그리고 마지막 호박과 시들어간 호박 잎에 대한 아쉬움을 담아 쓴 어머니의 육필 시 한 편. 거기서 나는 어머니의 숨결과 향내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신춘문예 공모용도 아닌데 굳이 떨 필요가 있는가. 누구에게 평가 받고 보이기 위해서 글을 쓰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건 열심히 쓰다 보면 훗날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보너스일 뿐이다. 생각의 정리, 달아나는 느낌의 기록만으로도 글을 쓰는 의미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쓰기가 어려운 분들은 이 언덕을 쉬이 넘지 못하는 것을 나도 안다.
학창시절 글쓰기 재능이 뛰어났던 어머니마저 이 선을 넘지 못하셨으니까.
한 고개만 넘으면 가뿐할 텐데. 연세가 든 분들이 여럿 있어 몇 번이고 강조하고 싶었다.
글을 쓸 때 인간 앞에 부끄러워 하지 말라고. 그렇다고 자신에게도 부끄러워 하지 말라고.
그러면 아예 시작 자체가 힘들어진다고. 정, 쓰기 힘드시면 낙서라도 좋으니 일기부터 쓰시라고.
나의 글쓰기도 어머니의 권유에 의해 초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쓴 그림일기가 시작이었다.
쓸 소재가 없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 중, 어느 하나에 정신을 집중하고 십 분만 관찰하라고 했다.
내가 말을 걸기 전에 그 대상이 먼저 말을 걸어올 것임에 틀림 없으니까.
그러면 그들이 들려주는 말을 그냥 받아쓰기만 하시라고 당부드렸다.
고치는 건 나중 일이라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라고. 책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펜과 종이만 있으면 어디서나 가능한 글쓰기. 취미로도 고상하지만 가장 경제적인 취미가 아닌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살다간 흔적을 내 자녀들에게 남겨주고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고 권했다.
관심이 있어서 모임에는 나왔는데 여지껏 시작도 못한 사람이 꽤나 있는 줄 안다.
어떤 아마추어 문학 모임에 가 봐도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글을 쓰기만 하면 그 맛을 볼 텐데 싶어 자꾸만 나도 모르게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질의 응답 시간에는 진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수필쓰기 애로사항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나누었다.
그런데 숫자표기를 두고 설왕설래를 했다.
예를 들면, 1갤런짜리 우유병이냐, 한 갤런짜리 우유병이냐 하고 물었다.
나는 평소에 우유를 사러갈 때, 1갤런 짜리 사 오라 하느냐 한 갤런짜리 사 오라 하느냐 거기에 맞추어 평소에 보편적으로 쓰는 말에 맞추어 쓰면 좋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1갤런이라 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한 갤런이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되면, 나도 헷갈릴 수밖에.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한 갤런'도 아니고 '1갤런'도 아니고, '원 갤런'이라고 한다.
말로는 '원 갤런'이라 하는데, 쓸 때는 '1갤런'으로 쓰고 있다.
나는 1갤런이라고 하지 한 갤런이라고 해 본 적이 없어서 작품 속에 그냥 1갤런짜리로 쓴다고 했다.
또 봉지에도 1갤런이라고 숫자로 되어 있지, 한 갤런이라고 풀어 써 있지 않다고 했다.
또 여섯 시라고 하느냐 눈에 뜨이게 6시로 하느냐 말이 많았다.
나는 우리가 말할 때 "육 시"라 하느냐, "여섯 시"라고 하느냐 거기에 맞추어 쓰면 답이 나올 거라고 했다.
나는 여섯 시로 쓴다고 말해 주었다. 의외로 이런 문제에 헷갈리는 분들이 많은 듯했다.
여든 셋의 할머니가 맞느냐, 83세의 할머니가 맞느냐. 나는 둘 다 쓸 수 있다고 했다.
(아이고, 두부나 조푸나, 비누나 사분이나 하고 농담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 분들에게는 심각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팔십 삼세라고 써야 하느냐, 83세라고 써야 하느냐 또 묻는다.
나는 숫자하고 말 하고 소리값이 같을 때는 숫자로 쓰는 게 시각적으로 더 쉽게 전달되는 것 같아서 83세로 쓴다고 했다.
하지만, 어른의 연세를 말할 때는 83세보다는 여든 셋이 좀더 점잖고 부드럽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내 개인적 생각보다는 더 정확하고 명확한 답을 찾아서 알려드려야 겠다.
질문이 많다는 건 관심있다는 증거요, 흥미있다는 얘기다.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열기가 느껴지는 가운데 시간이 제법 지났다. 정용진 선생님께서 끝마무리를 잘 해 주셨다.
돌아오는 밤 시간, 샌디에고의 맑은 날씨답게 별은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기분 좋은 밤이다.
P.S ; 오전에 라이센스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그동안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이 참에, 영어 공부도 바짝 해서 언젠가는 영문 에세이를 내 손으로 써봐? 하는 호기가 생겼다. 한번 실천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