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이 왔다.

처음에는 비가 오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눈이다.

마당 귀퉁이에도  제법 눈이 깔려 있다.

내가 잔 사이에 살짝 왔나보다.

지금은 슬슬 갈 준비를 하는지 맛만 보여주고 떠나려 한다.

아쉽다. 코트 깃에 잠깐 내렸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던 젊은 날의 첫눈.

그때가 생각난다. 그 사람도 생각난다.

 

멋있게 보이려 미장원에 들렸다가 조금 늦게 역에 도착했다.

타고 가려던 기차는 떠나고, 함께 기차여행을 가려했던 그는 무지무지(?) 화난 표정이다.

미장원에 갔다 오느라 늦었다 할 수도 없고.

멋적은 미소를 보내며 그의 눈치만 봤다.

다방에 들어가서도 계속 묵묵부답.

나는 버스를 타고 목적지로 가자고 했다.

어차피 연인들의 데이트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심통을 부리며 버스 시간표도 날더러 알아 보라고 한다.

'아, 이 사람, 이 정도밖에 안 됐나?' 싶어 나도 슬슬 짜증이 났다.

하지만 참자. 일단, 기차여행을 망친 건 나니까.

버스를 탔다. 밀양 표충사로 가는 버스였다.

길 사정이 나쁜지 그날따라 차가 몹시 덜컹거렸다.

그는 내 팔도 잡아주지 않았다.

나도 팔짱을 끼지 않았다.

애꿎은 버스 손잡이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마음도 점점 굳어간다. '아, 집에 도로 가고 싶다.'

덜컹거리던 버스가 마침내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렸다.

어두운 심적 세계와는 달리 바깥 세상에서는 우리를 반기는 듯, 흰 눈이 폴폴 날리고 있었다.

흰 눈은 목련꽃잎이 되었다가 나비가 되었다가 우리 앞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코트 깃에 흰눈이 앉았다. 그러나 이내 녹아 없어졌다.

얇은 얼음장 밑으로 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말없이 걷는 그의 뒤를 따르며 흐르는 냇물소리에 마음을 주었다.

'얼음장 밑으로 물밀져 오는 봄...' 쓸쓸한 내 마음에 일본 하이꾸 같은 싯귀 한 줄이 떠올랐다.

앞서가는 눈송이 위에 햇빛이 얹혔다. 레인보우 눈송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는 "레인보우 눈송이가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하고  호들갑을 좀 떨고 싶었다.

그러나  혀 끝으로 맴돌 뿐 소리로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앞서가는 사람.

'뒤돌아서서 가버릴까?' 하다가 또 참았다.

대신, 천천히 걸으면서 거리를 넓혀 버렸다.

뒤돌아보지 않고 걷는 그는 나와의 폭이 얼마나 멀어진 지도 모른 채 그냥 앞서 간다.

이제 나는 혼자다.

그냥 첫 눈 오는 거리에 나홀로 바람 쐬러 나왔다 치자, 하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하지만, 그토록 쓸쓸할 수가 없었다. 

이젠 나도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이게 그토록 설레면서 기다려왔던 우리들의 데이트였던가?

앞서 가던 그가 뒤돌아 보았다. 제법 많이 멀어진 거리.

그제야, 그는 멈추어 서서 기다려 주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것저것 주변 풍경 구경 하느라 늦는 것처럼 연기했다.

가까이 가자, 비로소 그가 빙긋이 웃었다. 약간은 멋적은 듯이.

아마 그는 화난 자신에 대해서 무척 부끄러워 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나도 마음이 풀렸다. 그러나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설레었던 만큼, 섭섭한 마음이 좀 오래갈 것 같다.

저녁을 먹고 OB맥주를 한 잔 마신 뒤 그가 고백하듯이 말했다.

첫 기차여행이라 너무나 가슴 설레면서 기다렸다고.

기차는 떠나고, 나는 오지도 않고.

창가에 앉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면서 무척 걱정을 했었다고.

그런데 막상 생글생글 웃고 나타나니 갑자기 화가 났었다고. 미안하다고.

나도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화를 오래 낸 건 나빴다고.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는 날이 무척 섭섭했던 날로 기억될 거라는 말을 할 때는 눈물이 와락 쏟아질 것 같았다.

어느 새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떠나야할 시간.

우리는 가벼운 미소를 나누며 헤어졌다.

웃으면서 헤어졌지만, 계속 섭섭했던 마음으로 그날 밤은 잠을 설쳤다.  

얼마나 섭섭했던지 첫눈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나 쓸쓸해진다.

첫눈을 보면, 그도 가끔 그 날을 떠올리려는지.

 

출근 기차를 기다리며 먼 산을 올려다 보았다.

마운틴 하이. 스키장이 있는 곳이다. 

눈을 하얗게 이고 있었다.

그 옆의 산도. 그 옆의 옆의 산도.

문득 사진을 찍고 싶었다.

옆 사람에게 사진을 좀 찍어 달라며 내 아이폰을 내밀었다.

처녀적 생각을 하며 약간의 포즈를 취했다.

하얀 눈을 인 산이 뒷배경으로 나와서인가. 포즈가 멋있어서인가.

검은 코트에 회색빛 체크무늬 울 머플러가 멋지게 조화를 이룬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워낙 사람이 작게 나와서 주름살도 안 보이고, 살 붙은 몸매도 코트속에 묻혀 별 흠으로 보이지 않는다.

배경으로 펼쳐진 설산의 부드러운 능선도 무척 아름다웠다.

만족스럽게 나온 사진을 보며 혼잣말을 하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괜찮네? '

이런 기분도 꽤 오랫만이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

첫눈이 와서 좋고, 잠시 옛추억에 젖을 수 있어서 좋고, 사진이 예쁘게 나와서 좋고. 

차창 풍경과 사진에 번갈아 눈을 주는사이, 설산의 부드러운 능선도 아슴아슴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