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띠 마을
나는 개띠와 유난히 인연이 깊다.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출생하셨고, 60년 뒤 갑술년에 내 딸이 태어났고(1970년) 그리고 다시 36년이 지나서 친손자와 외손자가 지난 병술년(2006년)에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우리 가족 중에 내가 제일 사랑하는 네 사람이 모두 개띠다.
어릴 땐 개를 무척 싫어했다. 아무 때나 짖어대고 조금 곁을 주면 기어오르는 개들 보다는 조용하고 깔끔한 고양이가 좋았다. 집에는 내가 돌보는 양이가 늘 두세 마리 있었는데 특히 살찌니는 나를 무척 따랐다. 언니들은 양이들이 저만치만 보여도 질색했다.
대문이 안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초인종도 없던 시절, 보충수업을 받고 모두 잠든 뒤에 집에 오면, 살찌니는 대문 고리를 달그락 달그락 안채의 식구들을 깨우려고 요란하게 야옹거렸다. 하지만 둘 째 언니가 밤늦게 대문을 두드리는 날은 대문 곁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요놈의 괭이"
그런 날 잽싸게 피하지 못하면 살찌니는 언니에게 가차 없이 걷어채였다.
어느 해 이사하는 날, 부모님은 우리들이 등교하고 난 뒤에 이삿짐을 옮겼는데 학교가 파하고 새집으로 돌아와 보니 내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전차를 타고 옛집으로 달려가 그들을 책가방에 숨겨서 새집으로 데려 왔다.
행콕팍에 살 때 기르던 밀키는 자유분방한 체질이어서 일 년에 한두 번, 꼭 네 마리씩 새끼를 낳았다. 네 형제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한 친구는 들어 올리면 눈도 뜨지 못한 주제에 활처럼 몸을 돌려 할퀴려고 했다. 두 친구는무덤덤하게 몸을 맡기는 편이고 넷 중의 하나는 젖도 떼기 전부터 사람의 손길을 즐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몇 대를 지나며 가장 사랑스럽고 온순해서 우리 집 적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 우윳빛 털에 푸른 눈이 고운 '사랑'이었다.
사랑이는 제 형제들처럼 밖으로 나 돌지 않았다. 늘 내 곁을 맴돌았다. 애들을 한 번 목욕시키는 날은 아들, 딸 다 동원해도 목욕실이 아水라장이 되고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어디거나 한 곳은 할퀸 상처가 나게 마련이었는데 사랑이만 그토록 싫은 일을 조신하게 협조했다. 조용하게 입욕하고 얌전하게 몸을 말리고는 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무렵, 지인의 집에 아이들과 함께 저녁 초대를 받아서 가게 되었다. 다른 놈들은 모두 밖에 나가고 사랑이만 내 무릎에서 자고 있었다. 긴 외출이 될 것 같아서 잠이 덜 깬 사랑이를 밖에 내어 보내고 문을 잠그고 떠났다. 밤늦게 집에 와 보니 다른 애들은 다 있는데 사랑이만 보이지 않았다. 밖엔 겨울비가 추적거리고 있었다. 밤도 늦고 비도 오는데 아침이면 어디서 나타나겠지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날이 밝자 마자 사랑이를 찾아 나섰다. 우산을 쓰고 온 동네를 사랑아, 사랑아 부르며 다니는데 차 한대가 옆에와서 멈춰섰다. 저쪽 골목길에서 무언가 본 것 같다며 그리로 가 보라고 했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거기 길 옆에 싸늘하게 사랑이가 누워 있었다. 집 밖이 익숙하지 않은 사랑이를... 잠까지 덜 깬 것을... 비 오는 길에서 비척거리다 달리는 차에 치인 것이 분명했다.
우산을 던지고 땅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사랑이는 어디로 갔을까? 어느 세상에 가면 사랑이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영혼이 없는 사랑이와 다시 만나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퍼서 견딜 수 없었다.
몇 달 후, 어느 비 개인 날 프리웨이를 달리다가 먼 하늘가로 흩어지는 새털구름을 보며 강한 느낌이 왔다. 아, 사랑이가 저 구름나라에 있구나. 그 순간 씻은 듯이 슬픔이 사라졌다. 사랑이가 마지막 안간힘으로 내게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다시는 고양이를 집에 들이지 않았는데 세월이 한참 흐른 어느 날 조이가 내 집에 들어 왔다. 미모의 조이는 한 살 쯤 되었는데 새집에 안정을 못하고 밖으로 탈출할 기회만 노렸다. 정이 가지 않았다.
조이가 겨우 내 집에 적응했을 무렵, 어미 젓을 갓 뗀 페키니즈 종 페기가 새 식구가 되었다. 조이는 긴 발로 페기를 때리기도 하면서 텃세가 심했다. 카펫 깔린 이층은 조이의 세상이고 트레이닝이 안 된 페기는 아래층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한 달 쯤 지나 조금씩 다리에 힘이 생기자 페기는 매일 이층을 한두 층계씩 오르는 연습을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나서 페기는 이층에 올라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피나는 노력 끝에 이층에 입성한 페기는 이때부터 조이의 이층 출입을 한사코 막았다. 층계 맨 위에 버티고 앉아서 조이가 아래층 계단에 한 발만 올려놔도 마구 짖었다. 아무리 어려도 개는 개인지라 페기가 짖어대면 조이는 무서워했다.
날이 갈수록 이층에서의 입지가 좁아진 조이는 견디다 못해 어느 날, 아래층 거실로 잠자리를 옮겼다. 한밤중에 조이가 야금야금 이층으로 잠입을 시도했지만 곧 페기에게 들켜 쫓겨 내려갔다. 아침에 거실에 내려가면 조이는 마치 ‘카노사의 굴욕’을 당하는 하인리히 4세 같은 표정으로 씁쓸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조이가 불쌍했지만 나를 따르는 페기에게 마음이 더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페기가 낮잠 자던 뒤뜰 의자에 늦은 오후의 햇살이 아직 따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