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 길따라 


김혜자      


  나의 첫 수필집이 출판되었다. 큰일을 했다는 포만감(飽滿感)에 가슴이 뛴다. 더욱이 출판에 온 정열을 쏟아 주신 스승의 배려로 조국 산천 여행길에 올랐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黃砂)를 걱정했지만, 며칠 전에 내린 비가 말끔히 씻어줬다에메랄드빛 바다처럼 하늘은 맑은 공기로 가득하다. 산자락을 타고 흘려내려온 아카시아 꽃 향기가 내 후각을 흔들고 지나간다. 향기를 붙잡아 손으로 어루만져 보고 싶지만 갈 길이 멀다. 뜨겁게 달구던 시심(詩心)을 외면하고 구름이 흘러가듯 나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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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부 내륙 고속도를 달린다. 이번 여행은 승용차를 타고 가기에 시간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 편리함이 있어 좋다. 눈부시게 발전한 농촌의 풍경과 자연이 나를 즐겁게 맞이한다. 낯선 신선함이 시시각각(時時刻刻) 다가온다. 한국의 산천이 변한 것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았지만, 창밖에 보이는 풍경에 탄성이 튀어나온다. 굽이굽이 산을 돌아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 남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충청북도 충주에 도착했다. 고구려 광계토대왕이 백제를 몰아내고 나라의 근원이 되는 땅이라 국원성(國原城)이라 이름 지었고, 통일 신라(新羅) 때는 중원경(中原京)이란 이름으로 불려오다 오늘날 충주(忠州)로 바뀐 곳이다. 충주는 우리나라 중앙에 있는 문화유산의 중심지이며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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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의 절친인 충주에 살고 있는K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명승 제 42 (충북 기념물 제 4)로 지정된 탄금대를 찾았다. 하늘을 이고 쭉쭉 뻗은 송림(松林)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이 부시다. 초록색 잎들의 속삭임은 여정의 노래이고 음이온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폐부를 요동친다. 숲길을 산책하면서  권태웅(1918~1951)시인의 감자 꽃 노래 비 앞에 발길이 머졌다.

 

감자 꽃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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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필요 없는 짧지만, 운율이 살아있는 시다. 감자 꽃을 보며 느끼는 감정이지만 파도치는 감동을 피 할 수 없다. 권태웅님은 1918년에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난 저항 시인 이다. 경성고보(경기고등)를 졸업 후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신 분이다. 도교에 유학 온 동기들을 모아 33회라는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운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투옥 후 폐결핵 3기의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일제의 일본식 개명 강요를 반대하다 결국 퇴학처분을 받았다. 오랜 지병인 폐결핵으로 인하여 1951년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일본 강점기 때, 감자꽃 가사에 항일 저항의식을 담아 감자꽃 노랫말을 개사하여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조선 꽃 핀 건 조선 감자

파 보나 마나 조선 감자

 

왜놈 꽃 핀 건 왜놈 감자

파 보나 마나 왜놈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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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처럼 자주색은 일본을 뜻하는 것이요, 하얀색은 백의민족인 우리나라를 말하는 감자 꽃. 권태웅 시인의 감자 꽃 시를 가슴으로 부르니 목이 탄다. 배고픈 시절 감자로 끼니를 채우던 시절. 총칼보다 더 무서운 붓의 위력으로 민족의 얼을 심기 위해 시를 쓰셨다고 생각하니 내 자신이 더욱 초라해 보인다.  

 

신라 진흥왕 때 가야국의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즐기던 탄금정과 열두 대로 가는 울창한 소나무는 우리 조상의 영혼이 깃든 역사의 현장이다. 기암절벽을 휘감고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물길이 가야금 타는 소리로 소나무 몸통을 에워싸며 역사 속의 애잔한 이야기로 묻어난다.

 

탄금대 서북편의 층암절벽인 열두대에 앉아 남한강을 바라본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비수진을 치고 왜병과 싸울 때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열이 난 활을 물에 식히기 위해 열두 번이나 오르내리며 지휘했던 곳이다. 신립장군의 함성이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 같다.

 

 물은 직선으로 흐를 때보다 곡선을 이루며 돌아갈 때가 아름답게 보인다. 역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안고 흐르는 남한강. 임진왜란 때 에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과 싸우다 패전 고배를 마시고 자결한 신립장군이 떠오른다. 비장한 신립장군의 울음은 세상 밖을 향해 반짝이는 물비늘로 토해내고 있는듯하다.

 

 인고의 세월 속에 흰 구름만 파란 하늘에 하얀 거미줄을 치고 있다그렸다가 지우고 다시 또 그려본다.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될 절박한 삶을 살다가신 우리들의 조상. 이곳에 그들의 뼈와 탯줄이 묻어있기에 가슴에 올라오는 뜨거운 사랑을 느낀다. 앞으로 만들어 갈  새로운 역사. 먼저 가신 선배들의 민족 정기와 의식을 선양해서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글로벌 코리안을 꿈꾸며 목마름의 문턱을 넘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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