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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딸로부터 빅베어에 있다는 전갈과 함께 몇 장의 사진을 받았다. 내년에 대학에 들어갈 딸아이와 함께 여기저기 다니며 추억을 쌓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매 순간이 훗날 얼마나 아름답고 그리운 추억이 될지, 이 애들은 지금 모르리라. 그러고 보니, 성가단 시절에 해마다 가던 빅베어도 안 가본 지 꽤 오래 되었다. 곧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던 S자 꼬불길을 아슬아슬하게 감돌아 정상 휴게소에 서면, 우리들 입에서는 더운 김이 나고 바깥 칼바람은 사정없이 우리 뺨을 갈겼다. 그러나, 그토록 고요하고 캄캄한 밤에 목련꽃 같이 하늘대며 폴폴 날리던 흰 눈발은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우리는 모두 묵언 수행하는 스님처럼 말문을 닫았다. 무슨 말을 하리. 아니, 모두가 숨 죽이고 있는 설원의 은빛 세계 앞에 무슨 말이 필요 있으리. 빅베어가 그립다. 함께 갔던 그 동무들도 그립다. 오늘, 십 오년도 더 지난 얘기를 딸의 사진이 불러 세워 주었다. 그 때 읊었던 시조 한 수와 단상을 다시 들추어 보며 회억에 잠긴다.
< 빅베어 가는 길>
빅베어 가는 길은
생각 밟고 가는 길
아득히 내려다 뵈는
인간 세상 동화런가
폴,폴,폴
흩날리는 흰 눈발
내 무게가 미안타
칼바람 맞고 서면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별빛 총총 하늘 아래
생각마저 걷어내면
오호라,
지구도 몸 가벼워
풍선처럼 떠 가누나
그랬다. 빅베어 가는 길은 생각 밟고 가는 길이었다. 언제나 왁자하게 떠들며 피스모비치로 떠나는 여름 MT와는 달리, 겨울 MT를 위해 빅베어 산장을 향할 때는 약속이나 한 듯이 조용했다. 눈 내리는 밤, 빅베어 밤길을 꼬불거리며 한참 올라가다 보면 아찔하기도 했지만, 겨울 풍경 속으로 모두 침잠해 버리는 듯했다.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눈을 맞으며 엎디어 있는 밤마을은 마치 동화 세상 같았다. 어둠속에 깜빡이고 있는 불빛들은 잃어버린 동화라도 들려주려는 듯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 불켜진 창 안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나른한 휴식을 취하며 하루를 마감하고 있을 사람들이 다정한 이웃인 양 느껴졌다. 숨고르기를 위해 잠시 휴게소에서 내린 우리들 뺨 위로 빅베어 정상의 칼바람이 스쳐갔다. 폴, 폴, 폴. 흩날리는 흰 눈발은 하얀 목련꽃같이 가볍게 아주 가볍게 흩날리고 있었다. 갑자기 내 무게가 미안했다. 육신의 무게보다 생각의 무게를 내려놓고 싶었다. 무념무상. 나도 지구도 풍선처럼 둥둥 떠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자유의지가 아니라, 빅베어 정상에서 불던 칼바람과 흰 눈발이 준 아름다운 선물이었다.(12-1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