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 속삭임

 

                                                                                                                                              공순해

 

    새 소리에 눈을 떴다. 허공의 삶을 사는 생물들의 소음이 소란하다. 짹짹짹짹. 세상 떠나가게 설전(舌戰)을 벌이며 무리가 서로 덤비듯 날갯짓을 해대더니 일시에 머리를 돌려 흩어진다. 허공의 아침 집회가 끝났나 보다. 의제가 무엇이었을까. 장소 이동에 관해서였을까, 먹이 분배에 관해서였을까. 그들은 의(衣)가 필요 없으니 식(食)과 주(住)가 어젠다가 됐겠지.

    그들이 흩어지고 하루가 시작됐다. 출근과 등교가 끝나자 집안은 다시 고요로 가라앉는다. 무료함이 강아지처럼 앞에 와 길게 배 깔고 눕는다. 이런 경우 유병근 선생님은 벽의 소리를 듣는다 하셨으니 집의 소리라도 들어봐야 하나. 또옥 또옥 또옥. 마침 일정한 박자로 건너 와 말 건네는 건 침묵했어야만 하는 수도꼭지다. 부엌 쪽으로 걸음을 놓아 수도꼭지를 꽉 잠갔다. 돌아서려니 바닥에서 삐꺽거리는 소리도 올라온다. 못이 헐거워진 걸까. 짐작해 보는 사이, 벽 안쪽에서도 탁탁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긁는 소리 비슷한 것도 들린다. 끼익 끽. 지하실 보일러에서도 소리가 올라온다. 순간 머릿속에 혼란이 온다. 빈집이 살아 있는 걸까. 서로 말 건네며 소통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집이 신음하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문제가 생겼으니 아는 체 좀 해 주세요, 하는 하소연. 언어로 의사를 나타낼 수 없는 갓난아기처럼 칭얼거리는 집의 소리. 집도 대화가 필요하구나.

    프루스트는 마들렌의 맛과 향을 통해 지난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했다.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길엔 소리도 있다. 집이 건네는 소리에 겹쳐 시간을 건너 들려오는 소리. 익숙했던 생활 소음들이다. 등굣길에 터지던 뻥튀기 아저씨의 고함. 뻥이요! 외침 뒤에 연기가 풀썩 오르며 굉음과 함께 튀밥들이 하얗게 쏟아져 내린다. 솜씨 좋은 엿장수 아저씨의 날렵한 가위소리에 헌책이나 양은을 들고 몰려드는 아이들. 메밀무욱, 찹싸알떡 외치는 한밤중 골목길의 네 박자 소음. 당고 죽통 소리. 희부연하게 오르는 김과 함께 퍼지는 구수한 냄새 가운데 외치는 뻔 뻔 번데기! 어린 시절의 자아를 형성했던 이런 골목 풍정(風情)은 그러나 이제 먼 나라 얘기, 아니 유물이 됐다. 익숙한 소음들이 바뀌고 사라져 가는 건 생활과 문화가 바뀌어 간다는 증거다. 이별이랄까, 상실이랄까… 양동이로 물 뒤집어쓴 듯 쓸쓸함이 온몸으로 척척하게 흘러내린다.

    소음, 소리에 마음을 내주다 보니 소리가 꼭 마음의 풍경만 이루는 건 아니라는 데로 생각이 벋어나간다. 소리는 치료제로도 쓰인다. 한약방에서는 침 맞는 동안 백색 소음 비슷한 음악을 틀어준다. 그 소리는 눈 감고 있는 동안 현실이 아닌 다른 시공간으로 영혼을 실어날라 덧난 곳을 아물게 해 준다. 백색소음이 주는 의외의 편안함이다. 

     나아가 소리는 스펙트럼에 따라 일종의 무기로도 쓰인다. 국기원에서 아들의 태권도 대련을 지켜본 적이 있다. 그들은 예를 갖춘 뒤 바로 기합을 질렀다. 기합과 동시에 동작을 취했다. 자신의 결의를 다잡기 위해서지만 상대를 누르고 기선을 잡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모든 운동 경기가 마찬가지다. 시작하며 팀원들이 외치는 함성은 사기를 올리고 기선을 잡으려는 선제 공격이다.     

     무서운 음성 병기가 된 예도 있다. 여리고 성을 에워싸고 일정하게 소리를 7 일간 지르자 공성전도 없이 성이 무너졌다 한다. 수십 만의 공격적인 함성에 성안 사람들은 얼마나 무섭고 공포스러웠을까. 혼이 녹고 간이 녹아 항복의 기를 든 게 아닐지.

     반대로 소리가 마음을 녹인 예도 있다. 역시 전쟁터에서다.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은 일시적이긴 하나 크리스마스 휴전으로 적에서 전우가 됐다. 각자의 참호에서 캐럴을 부르던 그들은 독일군 참호에서 한 병사가 상대에 대한 호기심에 못 이겨 참호 밖으로 몸을 내민 일을 계기로 서로 담배를 나눠 피우고 기념물도 교환하며 명절을 즐겼다. 그들의 돌발 행위에 각 지휘부에서 소동이 일어났지만 그들 가슴에 피어오르던 인간의 향기를 막진 못했다. 

   그렇다면 진정 아름다운 소음은 어떤 것일까. 묵음(默音) 가운데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소음을 듣는 게 아닐지. 고교 시절 음악 시간, 박찬석 선생님은 설파하셨다. 침묵은 은, 음악은 금이라고. 그러자 소음으로 묘사된 간주곡이 하나 떠오른다. 낙타 행렬을 몰고 가는 대상(隊商)들의 소음, 투덕투덕 걷는 낙타들의 발걸음 소리, 행렬의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 시장의 웅성거림, 뱀놀이를 즐기는 무리의 소음. 그런 소음들에 이어 음악은 멜로디로 이어진다.

      “~ 아득한 허허벌판, 사막은 고달파라. 낙타 등에 해가 지니 보금자리 찾는다.~”

     케텔비의 <페르시아의 시장>이다. 앤드루 류는 이 곡을 연주하며 악기로 뱀들의 움직임을 묘사하여 청중을 웃겼다. 비록 황폐한 사막이지만 삶의 즐거움은 놓칠 수 없다는 듯. 이로 보면 소음은 삶의 애환이다. 삶의 속삭임이다. 불현듯 즐거움이 솟구친다.

      낙타 발걸음 소리를 흉내내며 창으로 뒷마당을 내다보니 벌새들이 부리로 벌레를 쪼아 먹고 있다. 그냥 한 폭의 조충도 (鳥蟲圖)다. 정겨운 아침 풍경을 만들어내는 건 그들일까, 자신일까. 잠깐 이루는 물아일체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