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목 후기
이종운
아버지는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살뜰하게 가꾸며 고향에서 사시다 생을 마감하셨다. 나는 고등학교까지만 고향에서 살다 타지로 떠나 대학을 마치고,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입사 후, 해외 주재 근무로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귀국해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다 퇴직하고 나의 두 번째 근무지이었던 미국으로 이민 와 살고 있다. 이곳에 와서도 여러 번 이사했다. 태어나 한 번도 고향을 벗어난 적 없으셨던 아버지와는 달리 나는 팔순을 넘어서도 이사하며 타향살이하고 있으니 아마도 유목민(遊牧民)인가 보다.
새집을 마련하고 막 정을 붙이기 시작할 무렵, 갑작스러운 해외 전근 발령이 났다. 지상낙원이라는 미국 하와이였다. 새롭게 맞을 경험과 기대에 가슴 벅찬 기쁨으로 이삿짐을 꾸려 Pan Am 비행기에 올랐다. 찬란한 아침 햇빛을 맞은 와이키키 은빛 해변이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호놀룰루 공항에 내리자 ‘알로하’ 인사하며 레이 꽃을 목에 걸어주는 하와이 전통복 무무 차림의 여인들이 꽃처럼 아름다웠다.
벼르던 지상낙원 체험은 자꾸 뒤로 밀려났다. 아파트를 구하고 새로 개설하는 지점의 일은 산더미같이 쌓이기만 했다. 사무실을 구하고 통신망 설치에 집기를 사들이는 한편, 직원을 채용하고 교육하는 일, 영업망을 구축하는 등 끝이 없었다. 군대용어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만 했었다. 밤 12시 넘어서 까지 사무실에서 일하다 권총을 겨눈 순찰 경찰에게 심문을 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다 3년 차 들어서는 봄, 갑작스럽게 엘에이 미주본부로 전근 발령이 났다. 2년 만에 이삿짐을 다시 꾸리게 되었다. 그 뒤로 일본, 프랑스, 스위스 또다시 미국 엘에이로 뺑뺑이 이사를 하게 되었다. 대부분 조립식 가구를 그마저 때 묻고 윤이 나기도 전에 버리거나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이삿짐 꾸리고 풀기를 거듭하다 보면 단련도 될 법도 한데 이사는 언제나 스트레스였다.
곰곰이 되돌아보면, 이사는 늘 미지에 대한 설렘이자 도전이었다. 그 나라 법률과 제도를 알아보고 배우는 일, 색다른 문화와 행동 양식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일은 도전이면서도 행운의 기회이었다. 못사는 나라, 코리아에서 온 청년을 미개인 취급하고, 함부로 얕잡아 보는 서양인들과 내가 겪었던 문화충격은 오히려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1970년대 초, 코리아는 세계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약소국가였다. 요즘에야 세계 교역량 10위의 제조업 강국, BTS, K-팝과 K-드라마 등 한류 위세로 코리아를 모르는 세계인이 없을 정도이지만, 반세기 전 코리아를 아는 외국인은 많지 않았다.
오늘날, 문화 다원주의는 세계 지성을 관통하는 보편적 상식이지만, 그 당시 삐딱하게 기울어진 서양인의 문화 일방주의는 동양인을 무시했다. ‘너의 나라에는 알파벳이 있느냐?’ ‘KAL기 조종사가 한국인이라니 정말 놀랍다.’라는 식의 말을 함부로 했다. 코리아는 반만년의 문화 민족의 나라로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했고, 한글이라는 고유 문자를 가지고 있다. ‘라며, 코리아를 소개하는 책자를 건네주는 것으로 노골적인 그들의 우월감에 발끈한 나의 자존심을 달래기도 했다. 이삿짐을 풀고 터를 잡는 동안 이방인을 맞는 이웃들의 호기심과 친절에 귀중한 인류애를 느꼈다. 이삿짐을 꾸리고 헤어질 때는 그동안 쌓인 정이 짙게 묻어 있음을 확인했다. 다짐한 재회의 약속은 현실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다시 만나 잠시 정을 나누고 추억을 되새기는 기쁨은 또 다른 그리움을 잉태했다.
내 첫 해외 근무지 하와이에서 미주 한인 이민사에 관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하와이는 나무에도 돈이 열린다.’라는 광고를 믿고, 사진결혼을 했다는 한 이민자의 후손, 민 씨가 우리 부부를 그의 집으로 초대했다. 오하우섬 북쪽 ‘와이아루아’ 해변에서 밤늦게까지 초창기 이민 선조가 겪은 백인 지주들의 일방적인 노동착취와 비인간적인 대우의 사례는 눈물과 분노로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일당 60~70센트 중 20센트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아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단체에 지원한 사실이 점점 잊힌 미주 한인 이민사가 될 것만 같다. 라며 서운함도 비쳤다. 교통수단이란 소달구지밖에 없었던 조선이 태극기를 그린 비행기로 하와이를 오가다니!’ 감격해 마지않았다. 다음 날 이른 새벽, 집 아래 바닷가로 내려가 함께 굴을 따던 일, 그 시원하고 달콤한 굴 요리 아침 식사가 늘 생각난다.
일본 오사카시 나가이 ‘키쿠야 맨숀’에서 이웃으로 소아과 의사 ‘가와까미(川上)’씨 부부를 만났다. 그들이 미국과 한국의 내 집을 찾고, 우리도 그의 오사카 집을 방문하며 서로 며칠씩 함께 보내는 40년 지기가 되었다는 게 경이롭기만 하다. 가와까미 씨 부부는 한국인을, 생마늘을 먹고 냄새를 풍기는 조센징(朝鮮人), 야만인쯤으로 알고 있었고. 철저한 반일(反日) 교육으로 무장한 나와 아내는, 그들 부부를 36년간 한반도를 수탈한 일본인 쪽발이, 속마음과 겉모습이 다른 (혼내와 다테마에) 쪽발이로 경계했었다. 처음 우리는 그렇게 너무나 서로 다른 인종(人種)이었다.
예술과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에서 나는 선진국의 여유로움을 직접 경험했다. 1978년 외국인 주민등록을 마친 뒤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아동복지국 공무원이 내 집 아파트까지 찾아와 방의 크기를 재고, 시설과 구조를 살폈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갖난육아에 적합한지 직접 환경을 점검하면서 “아이는 국가가 키운다.”라며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아들의 ‘알로까숑 패밀리알르’(가족 수당)와 ‘로즈망’(아동주택 보조금)을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몇 년 후에는 떠날 외국인인 우리에게까지 말이다. 그게 1978년도의 일인데,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선 아직도 ‘선심 퍼주기’니 하며 서로 공방하고 있다. 그야말로 얼마 전까지도 보육 대란으로 갑론을박이었다.
1980년대 초, 부임한 스위스에서 TV로 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군인이 자기 나라의 국민을 무차별 살상하는 사격장이었다. 평화롭게 시위하는 광주 시민과 학생을 진압하는 대한민국 군인들의 과격하고 잔인한 모습은 TV에서 밤낮없이 방영되었다. 스위스인 동료 직원들이 ‘친척 친구는 무사하냐?’는 걱정이 부끄럽기만 했다. 그들끼리 하는 대화는 '잔인'(brutal) ‘야만적(barbarisch)’이란 단어가 섞여 있었다. 그들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스위스를 방문하는 한국인 승객들은 광주 항쟁을 전혀 알지 못했다.
1981년 9월 30일, 이웃 독일 바데바덴에서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88서울 올림픽이 결정된 84차 IOC 총회를 잊지 못한다. 88 서울 올림픽 한국 유치단을 돕던 일, 제24차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확정 발표되자 츄리히에서 스위스 지도자 5백여 명이 참석하는 축하 파티를 주최한 일은 감격으로 남아있다.
도착하기 전 내가 알고 있는 스위스는 그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신의 축복으로 저절로 만들어진 나라’이었다. 스위스는 ‘국민 하나하나가 힘들여 좋게 만든 나라’라며 그 슬프고 아픈 용병(傭兵)의 역사를 깨우쳐 주었던 스위스 친구들이 눈에 선하다. 게다가 매년 봄가을이면 지금도 우리를 찾아 주시는 스의스 교포 S 형님 내외분은 80년대 초, 스위스에서 만난 교포다.
두 번에 걸쳐 주재 근무했던 엘에이는 나의 제2 고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이다. 1970년대 초반부터 한국인의 미국 이민이 본격적으로 증가했다. 80년대 연평균 3만여 명이 넘는 한인들이 아메리칸드림을 안고 이민 왔다. 행복을 찾기 위한 도전의 길, 모국을 떠난 한인들의 L. A. 올림픽 가는 하루가 다르게 번영을 향해 변했다. 싱그럽지 못한 동포끼리의 잡음도 들렸지만, 끈기와 성실, 조국을 그리는 마음은 매일 한인촌을 달라진 모습으로 만들어 갔다. 우정의 종각, 코리안 퍼레이드 등 많은 교포 행사에 본국 기업으로서 힘을 보탤 수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에 이민 와 리버사이드에서 도산을 배우고 도산 동상 건립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축복이다. 한마음 독서회를 설립, 한인 동포들의 여가 활용을 돕고, 리버사이드와 코로나 시립 도서관에 한국도서 코너도 설립한 것도 큰 자부심으로 품고 있다.
돌이켜 보면 나의 젊음은 대한민국 선진국 만들기 최전선에서 좌충우돌의 삶이었던 것 같다. 장소가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고 한다. 여러 나라,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면서 교과서로는 배울 수 없는 체험은 귀중한 것들이었고, 사고방식 또한 나도 모르게 깊고 넓어져 갔다. 힘들었지만, 그 많은 이사가 나를 인간적으로 조금은 너그럽게도 만들지 않았나 싶다.
지난해 가을, 내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 이사라는 큰일을 또 한 번 치렀다. 이삿짐을 비운 방마다 마지막 청소를 한다. 가구가 놓여 있었던 벽면과 바닥들이 빛바랜 주변과 대조돼 새것처럼 그대로 남아있다. 먹먹히 선 채 잠시 일손을 놓는다. 눈길이 거기 한참 머문다. 가구 크기만 한 선명한 자국들이 마치 작별을 아쉬워하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 같다. 지난 유목민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그래, 떠난다고 영원히 잊는 것은 아니야! 잘 있어!’
유목지 목록에 또 하나 보탠다. 손녀들과 함께 꼭 다시 찾아보고 싶은 나의 유목지(遊牧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