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네 내니가 그만두는 바람에 내가 3주째 가사도우미 노릇을 하고 있다. 다행히 회사에서 임시 내니를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며칠 전부터 손녀 돌보는 일이 조금 수월해졌다.

 어제는 허벅지가 내 허리만한 히스패닉 아가씨가 왔더니 오늘은 동양인 모습이 살짝 비치는 날씬한 아가씨다. 나를 보자 첫마디가 " 나 한국말 할 줄 알아요." 한다. 반가운 마음에 국적을 물어보니 할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인이고 할머니는 스페인이고 자기 엄마는 한국인이란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는 유럽사람이고 엄마는 한국사람이다.

외국인과 결혼한 엄마가 딸에게 이만큼 한국말을 가르쳤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이 아가씨는 한국말을 곧잘 한다. 발음만 조금 어눌할 뿐 자기 표현을 하고 내 말도 다 알아듣는다. 오히려 내가 잊어버리고 영어로 말하면 자기가 한국말로 대답한다.

 그런데 하는 짓은 정말 맹하다. 뒷마당에서 아이와 물놀이를 할 양으로 플라스틱 풀장에 물을 가득받았다. 나는 손녀 옆에 붙어서 장난감을 갖다주고 물도 뿌리며 시중을 드는데 자기는 멀찌감치 타올을 깔고 앉아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땡볕에서 한참을 그리 놀다 보니 내가 슬그머니 화가 나려고 했다. "여기 와서 아기랑 좀 놀아줄래?" 부탁을 해 놓고 집 안으로 들어가 아기 점심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5분도 안 되어서 따라 들어왔다. " 아기가 머리를 부딪혔어요. 겁이 나서 데리고 들어왔어요." 신발을 신고 마루를 저벅거렸다.

 

아기 점심으로 민어를 굽고 달걀국을 끓였다. 밥을 푸고 민어구이를 상에 올리고는 국을 푸고 있었다. 아기가 의자 위로 올라가 손으로 밥을 집어 입에 넣는 모양이었다. 옆에 앉아서 밥을 잘 먹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국을 들고 상에 갔더니 아기 손에 민어가 한조각 들려있는데 가시가 삐죽삐죽 나와있다. 내가 질겁을 하자 가시가 있는데... 하며 자기도 놀란 시늉을 한다. 앉아있는 그녀와 하이체어의 아기 사이에 서서 내가 가시를 발라주는데도 일어날 생각을 안했다. 머리가 참 둔한 아가씨네... 또 화가 나려고 했다. "좀 일어나줄래?" 내 말이 딱딱했나 보다.

아가씨의 얼굴이 벌개지며 후다닥 일어났다. "아줌마 땜에 나 지금 기분이 아주 나빠요. 아줌마 왜 나 화나게 만들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순간 큰일 났다 싶었다. 집에 가서 지네 엄마한데 한국 아줌마 나뻐. 하면 어떻하지. 한국사람 싫어! 하면 어떻하지?  벌떡 일어나서 미안하다. 아기가 가시를 먹은 것 같아 너무 급해서 그랬어. 정말 미안해. 마음이 좀 풀렸어? 미안해. 열번도 넘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아가씨는 생긋 웃으며 괜찮다. 이해한다. 했지만 나는 계속 미안하단 말을 했다. 너 감정을 말 해 주었기 때문에 내가 조심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며 애교도 떨었다. 'I Message'를 하는 거 참 좋은 대화법이라고 칭찬도 해 주었다. 

 

 외국 며느리를 본 한 선배가 말했다. 한국말이 안 통하니 더 편하다고. 기분이 나빠도, 좋아도 서로 표현을 못하니 다툴 일이 없다고 했다. 사실 이 아가씨도 한국말을 할 줄 알다보니 짧은 단어에서도 내 화 난 감정을 읽어버린 것이다.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것이 편한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불편한 격이 되어 버렸다. 

 

 이 후로 나는 아기에게 딸기를 주며 아가씨에게도 따로 접시에 예쁘게 담아 바쳤다. 아기 우유를 먹이며 아가씨에게도 오렌지 쥬스를 올려드렸다. 내니가 아니라 상전으로 모셨다.  그녀는 자기가 진짜 손님이 된 양 아기가 잘 때는 아예 차에서 책을 갖고 들어와 소파에 푹 파묻혀 읽었다.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아가씨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퇴근할 때 나를 꼭 안아주고 갔다. 그런데 내 맘은 그렇게 편치가 않다. 아직은 내가 인간관계에 세련되지 못한건가, 속이 좁은건가?